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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진사공 선재 김극의선생의 불천위제사 유래

백운선사 김대현 2019. 7. 5. 19:53

성균진사공 선재 김극의선생의 불천위제사 유래

선재 김극의선생(1459~1517) 탄신560주년  

제사는 돌아가진 선조 4대까지 지내는 것이 보통 일이라 4봉사(奉祀)라고 일반적으로 말한다

예전에는 임금님이 우리 모두가 존경해야할 인물에 대하여 자손이 있는 한 영원히 제사를 지내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불천위라 하는데

불천위는 임금님이 정한 불천위를 국불천위(國不遷位)와 유림에서 정한 유불천위 사가에서 정한 사불천위가 있다

 

대대로 불천위는 그분의 음덕과 모범의 절도를 따르고 기르며 또한 최고의 존경을 표하며 이런 불천위를 가진 가문은 명예에 맡게 행실이 돈독히 하여 이 불천위로 인하여 오랫동안 문중을 올바르게 지켜오는 원천이 되었다

 

안동지역에는 보백당 퇴계 서애 학봉선생등은 국불천위 즉 왕이 정해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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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선재 선생의 부 보백당선생은 안동의 청백리로서 가장 앞선 인물중에 한분이시다

보백당 김계행(자 취사 시호 정헌)은 서기 1431(세종13)에 태어나 1521(중종16)에 세상을 떠나셨다

 

보백당선생은 조선 전기 영남 유림에 몇 안 되는 중량급 인사이시며

 

푸르기가 청옥 같고 깨긋하기가 백옥을 닮은 것처럼 스스로 자작당호인 보백당선생은 당호같이 청백의 표상이며 그 기상이 푸르고 성품이 깨끗하기로 유명하시다

 

외현손 서애 유성룡이 보백당은 강직한 분이라 극칭송을 하였다

 

1706년 숙종조에 영남 유림에서 길안 묵계서원을 지어 보백당의 덕망을 추모하고 향사를 지냈으며 보백당선생은 비안현감 김삼근의 둘째 아들이시며 맏집의 형은 김계권이며 맏조카는 학조대사이시다

학조대사는 당대의 고승으로 임금의 신임이 두터웠고 고승 신미대사와 함께 쌍벽을 이루며 국사로 추앙되셨던 유명한 스님이시다

 

보백당선생은 아들 다섯 딸 둘을 두셨는데

맏이는 참봉 둘째 셋째는 진사생원으로 아버지 보백당선생이 물러준 청백을 지키며 사랑하였다고 전한다

 

특히 선재 김극의선생(1459~1517)은 바로 둘째 아들로서 부 보백당선생을 뫼시고 효행을 근간으로 삼으면서 외유내강하시며 청백을 몸소 실행하며 덕행이 올바르고 만인의 모범이 되었으며 문장이 특출하고 성균진사로 여러 선비들과 교유하였다고 전하나 그 정확한 자료는 전하지 않아서 아쉽다

 

현 종손(대현)은 어릴적에 조부(창한)님으로부터 전해들은 즉 선재선생의 불천위제사가 옛날에는 지내오다가 종가의 가세가 기우려지면서 못 지낸지가 100여년이 넘었는데 이것을 다시 우리대에서 고유제를 지내고 일으켜 세워야하는데 경제사정이 여의칠 못하여 그 일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으시다며 늘 안타까워하시던 말씀을 들으면서 유년기를 보내었다

 

보백당선생의 국불천위교지증정과정을 보았을 때 선재선생은 국불천위는 아닌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다만 유불천이나 사불천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으나 종가의 구전에 종손이 조부(창한)님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유불천에 가까우나 외람되게도 자료나 서책이 전하지 않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선재선생묘소는 묵계 맏형 묘 근처에 있던 것을 1960년대 말경에 길안 검단으로 이장을 하였으며 진사공 선재선생의 후손은 안동 길안 청송 영양등에 주로 세거지를 두고 활동을 하였으며 종가의 종택은 1500년경에는 묵계에 세거지를 두었다가 그 후로 1600~1700년대 대곡리 검단 임하 내급에 있었으나 화적때의 습격으로 소실되고 그후 1800년대 석보지경에 세거지를 두었으나 화제로 소실되고 현재 1900년대 영양 입암 고구름에 세거지를 두고 오늘날까지 세거하고 있다

 

문중 선산은 길안 대곡 검단에 자리하며 재실은 한국동란시 길안 대곡 제궁골에 제궁은 동란중 군인에 의해 간첩소탕작전 명목으로 고의화제로 소실되고 현재 검단에 1959년경에 영모재 정자를 중건하여 전해오고 있다

 

또한 불천위제사를 봉행한 정확한 연대나 근거는 자료가 전해오지 못한 관계로 알 수가 없으며 또한 진사공 종가의 여러 번의 세거지 이전과 사화와 화적때 습격등으로 집안의 각종자료와 서책이 소실되고 또 근래에 사라호태풍 피해로 그나마 전해오던 서책들마저 급류에 유실되고 오직 종가의 구전에 의지 할 수밖에 없어서 안타깝다

 

종가 구전에 의하면 1706년경 숙종조에 영남 유림에서 길안 묵계서원을 지어 보백당선생의 덕망을 추모 할 즈음에 이미 임하 내급에 영모재를 지어 진사공 선재김극의선생을 추모제향을 하였으며 그 후에 종가의 가세가 기우려지면서 불천위 제사가 끊기어 있다가 현 종손(대현)이 조부님으로부터 이런 불천위제사 유래를 전해 듣고 늘 안타까워하다가 선재선생 불천위제사를 차후에 경제사정이 좋아지면 고유제를 올리더라도 비록 고유제를 올리지는 못하더라도 조부님으로부터 전해들은 성균진사공 불천위제사를 현 종손(대현)1988년 결혼 후 현종부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종부(이영애)가 선뜻 응하여 우리라도 먼저 매년 제사를 봉행하자고 하여 결혼 이듬해 19897월 초순부터 해마다 선재선생 제사를 봉사하여 오다가 그 후에 대구에서 지파의 종손 현동 옥현과 공의하여 음력 7월 첫째 일요일 8시에 봉행하기로 결정한 후 불천위제사를 봉행하여왔다

 

금년 종손이 진보로 이사를 하면서 현대인들이 참여하기 좋게 일요일에서 토요일로 제사 날짜를 변경하여 불천위 제를 올리기로 공의 결정하였다

 

다만 검단 재실에서 불천위제사를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일손을 도와 줄 인력과 또한 교통편 등등 여러 사정을 감안하여 당분간은 종손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봉행하기로 하며 차후 종손이 진보에 세거지를 완전히 자리 잡으면 그 자리에 영모사당을 짓고서 선재선생 불천위제사를 여러 지손들과 봉행하기로 공의하고 당분간은 협소하지만 종가집해장국식당에서 시행하기로 결정을 하고 상기와 같이 유래를 서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