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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달마가 놀다간 김해 은하사의 가을

백운선사 김대현 2010. 8. 16. 03:09

 

 

달마가 놀다간 김해 은하사의 가을

 

 

 위치 : 경남 김해시 삼방동 882번지

 관리소 : 은하사종무소 : 055-337-0101~5

 개요 : 전설에 의하면 가락국 수로왕 때 장유화상이 창건한 사찰로 원래 이름은 서림사였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소실되었는데 1600년대에 중창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다포계양식의 맞배집으로 용두와 봉두를 새겨놓아 화려하게 장식하였는데 이들 조각과 구조 수법으로 보아 조선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의 수미단에 쌍어(雙漁)문양이 있어 인도 아유타국과의 관계를 전하고 있다.

  은하사 대웅전 (경남도유형문화재 제238호)은 조선 중기 이후의 건물이다. 

 

 김해 은하사하면 우선 김해를 제외한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어떻게 알고 있을까 ?

 찬란한 금관가야의 고도 김해 중심에 있는 사찰이라기 보다는 '달마야 놀자!' 라는 영화촬영지로써 더욱 유명해진 곳이리라

 지금도 은하사 입구에 가면   "'달마야 놀자!' 라는 영화촬영지 안내판이 관람객들을 처음으로 반긴다.

 

 신어산은 김해시에 위치해 있는 산이다.

 신어(神魚)란?  수로왕릉 정면에 새겨진 두 마리의 물고기인데 인도의 아유타국과 가락국의 상징이다.

 은하사는 신어산의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천년고찰이다. 

 

 가락국의 수로왕인 허황후의 오빠이자 인도의 아유타국의 태자인 장유화상이 창건한 절이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는 불교가 인도에서 직접 우리나라에 들어 왔음을 뜻하는 것이다. 

 

 은하사는 영화 '달마야 놀자'의 촬영지로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그것이 사찰을 인식하는 본질은 아닐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는데 은하사는 관세음보살을 본존불로 모셨다.

 낙동강과 남강 남녘의 산들,  신어산 은하사는 그 낙남정맥의 끝자락에 앉아있다. 

 

 아름다운 단풍과 신어사 입구 삼문  @2008  사진사 : 양촌재 / 촌장셈(김진수)

 

 등산로 입구에 있는 법구경 문구가 새겨진 돌탑

 은하사를 올라가는 돌계단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은하사의 단풍

 

 

 

 

 

 은하사 돌탑을 돌며 소원을 빌고 있는 불자

 은하사 대웅전

 

 

 

 

 

 

 은하사 명부전과 배롱나무 

 은하사 범종루

 

 

 

 

 최근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 촬영지로 더욱 이름이 알려진 은하사(055-337-0101)는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 때 장유(長遊) 스님이 창건했다고 하는 고찰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나 『삼국유사』 「가락국기」 등의 내용을 그대로 따른다면 무려 2,000년 전의 일이 된다. 우리가 배운 불교 공인 시기를 훨씬 앞당겨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판인데 학계에서는 아직도 의견이 엇갈리는 모양이다. 6세기 신라에 통합되기 전까지 신어산 아래, 낙동강유역을 석권하며 빛나는 문명을 떨쳤던 금관가야에 대한 부족한 연구 때문이다.
장유 화상은 신어산의 영구암과 동림사, 지리산 칠불암까지 창건주로 꼽히는 분이니 신라의 원효나 의상 스님처럼 가야 불교의 시조로 여겨지는 분이다.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배를 타고 김해까지 건너와 수로왕과 결혼한 허황후의 오라버니되는 이다.


이 도량에서 그는 그의 고향과 가야국을 위해 수행정진하며 수로왕의 일곱 왕자를 출가케 하여 마침내 칠불로 탄생토록 하였고 스스로도 수행정진에 전념하여 성불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이후 신라에서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승대덕과 석학들이 이 곳에서 수행정진하였을 터인데 세월의 더께가 그만 그 흔적을 가려놓고 말았다. 다만 임진왜란 이후의 역사는 전해오는 이야기와 정현당(靜玄堂) 안에 모아놓은 여러 현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경상우도김해부신어산은하사불상중수개금기(1767년)」,
「중수서림사선당기(1812년)」,
「김해서림사대웅전관음존상개의후불탱화성기(1835년)」 등 10여 매의 현판을 들여다보노라면 마치 글을 쓸 당시 정성스레 붓을 든 스님 앞에서 은하사의 옛일을 하나하나 듣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된다. ‘수로왕의 원당’임을 자세하게 일러주시기도 하고 한때 ‘신라고찰’로 여겨졌던 일이며 중수 공덕주 ‘배(裵) 씨’의 이야기 등.
 
또한 현판에는 은하사(銀河寺)와 서림사(西林寺)가 함께 보이는데 본래는 신어산(神魚山)이라는 이름과 관련해 은하사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인조 22년(1644년)에 복원하면서 절 이름을 가까이에 있던 동림사(東林寺)와 구별해 서림사라 하고 두 사찰이 중창을 거듭해온 것이 아닌가 생각케 된다.

그 후 일제치하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다시금 잃을 뻔하였던 자취를 이 현판들을 통해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현판들 역시 부엌에 아무렇게 놓여 아궁이 속에서 한순간 사그라질 위기에 있었다고. 다시 한번 따뜻한 눈길로 현판을 바라보게 되는 까닭이다.
은하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너럭바위로 놓은 돌계단과 대웅전 앞에서 올려다보는 신어산 정상의 우뚝 솟은 바위들이다. 이 바위들은 모두가 나한상이라 여겨져 지금도 이 곳을 나한도량으로 삼아 기도하는 불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오고 있다. 

단청과 벽화가 잘 남아 있다는 대웅전이 마침 보수 중이어서 그 예스런 모습을 눈에 담지 못하였다. 대웅전에 모셨을 관세음보살님은 다행히 보제루에 모셔져 있어 참배할 수 있었다. 현판에 드러난 대로 170년 전 ‘개의(改衣)’한 그대로인 듯 과연 위엄과 장엄함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신어산의 가을풍경

 

 영구암에서 바라다 본 가을풍경

 

 

 

 

 

 

 

 

 

 

 

 

출처 : 사진이 있는 "양촌재의 행복갤러리"
글쓴이 : 촌장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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