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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광토비

백운선사 김대현 2010. 6. 18. 14:26

광개토왕비 다시 읽기

역사이야기/고구려 2008/03/27 14:30 약수


광개토왕비 다시 읽기.

(권명수님 블로그 말과 역사에서 발췌 정리)

(1) 개요.

고구려 광개토왕비의 비문(碑文)을, [아마츄어]인 나부터도 우선, 이해할 수 있게끔,

새롭게 읽으려 한다. 이 비문에는 무슨, (倭)가 바다를 건넜느니, 아니니 하는 논쟁,

그 이상의 것인,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숨겨져 있다고 본다.

해서, 같이 공부하시는 셈 치고, 이를 보셨으면 좋겠다.

고구려 제 19대 왕, 광개토왕(廣開土王)은 우리가 갈구하는 영웅의 [모델]이다. 

왕은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로, AD 374~412 년간 생존했으며, 우리네 역사상,

자신의 당대에, 가장 넓은 땅을 공략하고 경영했던, [오우너](owner)이자, CEO였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했을까?  이 비문으로는, 그 명분과 결과만 대체로 알 수 있을 뿐,

어떻게 [노우 하우](know-how)는, 여전히, 영웅의 신비(神秘)한 영역이다.


- 100여 년 전의 광개토왕비의 귀한 사진 [이미지].

일본어로 된, 설명문 제목에, 고구려(高句麗) 호태왕릉비(好太王陵碑)라고 적혀 있다. 

6.39m 높이의, (氣)가 서려 있는 듯하다 자연석의 비석은

그의 아들 장수왕(長壽王) 시절, AD 414년에 건립됐고,

현재, 중국 만주 땅의 [jian, +안](集安) = 우리 말의, (해) 솟아+오르는 곳에 있다.  

비문(碑文)의 경우, 이미 숱한 분들이 해석을 했으므로,

내가 실은, 새롭게 해석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으나, 내 관심은 그네들이 간과한,

우리 옛 말의 흔적이다. 

일본은 이 비문을, 그네들의 소위, 만선 사관(滿鮮史觀)에 철저히 악용했다. 

, 고구려는 마한(馬韓), 변한(弁韓) 및 진한(辰韓) 등, 삼한(三韓)과는 다른,

만주(滿洲) 출신이라는 것이다.  해서, 고구려의 도읍은 만주(滿洲)에 있었고,

대신에, 대동강 변에는 중국의 낙랑(樂浪)이 있었으며, 나중에,

삼한을 계승한 신라(新羅)가 한반도를 통일한 것이고,

고려와 조선은 그 후계라는 논리이다.  발해는 아예, 중국의 역사라고도 했다. 

과연, 그럴까? 

우선, 낙랑(樂浪)[lelang, 러랑]은 그 음운으로 봐서도, 한반도에는 없었고,

[liaohe, 랴오허](遼河)의 근방에 있었다.  최리(崔理)의 [러랑](樂浪)은 별개의 것이다.

다음, 고구려의 도읍들이 주로, 만주에 있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허나, 문제는 , 즉 음운이다.  만일, 고구려가 우리 말을 같이 썼다는 것이 증명되면,

중국과 일본의 주장, 즉, 고구려는 우리 민족이 아니라는 논리는, 즉시, 무력해진다. 

내 관심은 바로, 그 음운이다.

광개토왕비는, 부여(夫餘)가 한자를 수입? 한 지, 5~600년 후의 비문인지라,

비문의 한자는 중국어 어순이되, 고유명사들은 우리 말들임에 틀림 없고, 한자의 훈으로는

해석이 어색한 것들이 바로, 우리 말이라고 본다. 해서, 나는 이것들의 존재를 이 글에서

밝히려는 것이다. 그리고, 왕가(王家)에서 인정한 용어는 가장 보수적인 것일 터이다.

이 비문은, 서문 및 비려(裨麗) 관련 318자(字), 백제 관련 366자, (倭) 관련 382자,

부여(夫餘) 관련 95자 및 수묘(守墓) 관련 641자 등, 44행(行) 1,775자로 구성된다. 

허나, 광개토왕의 업적은, 비문에 나타난 것 말고도, 북방의 거란(契丹)과

중국 화북 지방의 후연(後燕)을 경략한 것 등이 더 있다고 한다.

비문의 일부도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1881~1885년 사이,

일본군 대위 [사꼬오 가게노부](酒勾景信) 등이, 비문을 변조한 결과의 것이라는,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들을 비롯하여,

1900년의 [나이또오](內藤) 탁본(拓本), 1902년 [양써우징](楊守敬) 탁본,

1907년 [프랑스]의 [사반누] 탁본 등이 있다 한다. 

이제, 비문을 내 나름으로 해석하겠다.

1)-유석(惟昔) 시조(始祖) 추모왕지 창기야(鄒牟王之 創基也):

통상적인 해석은, 옛 쩍에, 시조 추모왕의 만드신 터이니 이다.

보통, 제사의 축문(祝文)은 유세차(維歲次)~ 로 시작한다. 

이때, (維)[wei, 웨이]는 흔히, 헛 기침 정도로 의미가 없다고 해서, 심지어,

한글 축문에는 빠져 있다. 

허나, 나는 그 [웨이]가 우리 말의, 여기 보십시오가 압축된 것이라 본다. 

우리 말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중국인들이 전화 통화에서, 여보시오의 의미로, [wei, 웨이]()라고 하는데,

그 발음의 근원은 우리 말이다. 유석(惟昔)[weixi, 웨이씨]의 경우에도,

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웨이]의 한자 훈(訓)은 오직, 생각하다, 어조사이다. 

허나, 나는 [wei, 웨이](惟)가 여기서는, 우리 말의 이고,

뒤의 [xi, ](昔)가 이를 거듭 풀이한 것으로 본다. 

추모(鄒牟)[zoumou, 쩌우+뭐우]는, 그 별칭들인, 주몽(朱蒙)[zhumeng, 쭈멍],

도모(都慕)[dumu, 뚜무] 등등의 한자 뜻과는 무관하게, 우리 말 발음의,

솟은/ 돋은, 또는 첫+밝은, 높은 사람이다. 

나중에, 고등(高登)[gaodeng, 까오떵]신(神)으로 모셔졌다. 

[까오+떵]은 우리 말의 가운데+돋은이다.

---의미의 차이는 없다고 보지만, 이 글에서는, 광개토왕비가 선택한 한자들을 존중하여,

그 중국어 발음으로, 주몽왕과 유리왕 등의 고유명사들을 부르고자 한다.

우리 식의 한자 읽기는 오히려, 실체와는 거리가 있다. --- 

헌데, 이 첫 구절의 주어(主語)는 무엇일까? 

2개의 가능성이 있다. 술어(述語)가 (基)라면, 그 주어는 고구려가 아닐까? 

만일, 주어가 [쩌우뭐우]왕이라면, 지(之)[zhi, ]가 없어도 말이 된다. 

그러면, 옛 쩍에, 시조 추모왕이 터를 만드셨으니로 될 것이다.

헌데, 중국어의 (之)[zhi, ](之)= 丿[be, ]+一[yi, ]+丿[be, ]+[bu, ]’는,

우리 말의, 무엇+으로+부터+비롯한+바의+솟아 이른에서 왔다.

---참고로, 현대 중국어의 소유격으로 쓰이는, (的)[de, ]는,

우리 말의 (~으로부터) 돋은 바의이다. 중국어에서 조차, 한자의 훈(訓)은 무의미하다! ---

헌데, 만일, [쯔](之)가 ~의= ~로부터 솟은 바의의 뜻이 아니라, 발음 그대로,

우리 말의 지은(build)이라면, 뒤의 [창](創)이 [쯔]를 역시나, 거듭 풀이한 것이 된다.

무슨 말씀인고 하면, 이 비문에는,

우리 말의 구어(口語)와! 한문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2)  추모왕의 남하(南下).

고구려의 국조(國祖), 추모(鄒牟)[zoumou, 쩌우뭐우]왕은 기이하게? 탄생하여, 홀본(忽本)[huben, 후뻔], , 졸본(卒本)[chuben, 추뻔]을 거쳐, 남쪽을 향한다.

엄리대수(奄利大水)의 물가에 몰려서, 황천(皇天)하백(河伯)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일본의 [마쓰리](祭)에서의, 강을 건너는 수레,[おみこし, 오미꼬시](御輿, omikoshi)의 [이미지].

추모왕의 도강(渡江)은, 이와 비슷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당시에, 이런 수레들이 여러 채, 물을 건넜을 것이다. -

2)-출자(出自) 북부여(北夫餘) 천제지자(天帝之子),

(母) 하백여랑(河伯女郞), 부란 강세(剖卵 降世)

생이(生而) 유성(有聖) *:

, * 표시는 훼손된 글자들이다.

통상적인 해석은,

나오신 쪽은 북부여로써, 천제의 아들이시다.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며, 알을 깨고, 세상에 내려오시니,

태어나시면서 성덕이 있으셨다.

출자(出自)의, (自)[zi, ]는, 우리 말의 ~쪽으로부터이다.

천제(天帝)[tiandi, 티앤+띠]는, 윗 돋아 오른 (터의)+돋은 이인데,

이 당시에는 그 진정한 의미를 잊었을 수도 있다. 

이 표현은, BC 239년에 북부여를 세운, BC 262년 생의,

해모수(解慕漱)[jiemushou, +무+써우]= (해) 솟아+밝은+ 사람을

지칭한다고 보여진다. 

헌데, [쩌우뭐우](鄒牟)왕은, 실은, [제무써우](解慕漱)의 둘째 아들,

고구려후(高句麗侯) 고진(高辰)의 손자로, 옥저후(沃沮侯) 불리지(弗離支)인,

고모수(高慕漱)[gaomushou, 까오+무+써우]= 가운데+밝은+첫

유화(柳花)부인과의 소생이라고 한다.

---당시의 한 세대가 20년이면, 이 관계도 중간이 생략됐다고 보이지만.

불리지(弗離支)[fulizhi, +리+쯔]는 우리 말의, 높이+올라+솟은 이,

곧, 우두머리의 직책을 말한다. 유화(柳花)[liuhua, +화]도 한자의 뜻처럼,

버들 꽃이 아니라, 우리 말 발음의, 올라+밝게 (피어라)로 작명된 것일 터이다.

유화 부인은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쩌우뭐우](鄒牟)를 생산했다. BC 79년의 일이다.

9~10세대 이전의 아버지? 는, 난생 설화에서, 햇빛으로 비유했으니 그렇다 치고,

어머니는 왜, 이름을 쓰지 않고, 하백의 따님이라고만 했을까? 

아마도. 천제와 격(格)을 맞추려 했을 것이다.  

---장수왕 시절에는 이미, 부여신(夫餘神)으로 추존이 됐는데도 말씀이다. 

알을 깨고 나왔다는, 난생(卵生) 설화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홀본(忽本)[huben, +]= (해) 높은 (터의)+밝은 곳에서는,

[쩌우뭐우](鄒牟)가 분명한 이방인이라는 것을 말한다. 

영웅에 씨가 따로 있겠는가 만은, 장수왕은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처럼,

하늘에서부터 찾았다.  다만, [제무써우]가 승계한 바의,

고조선과 단군이 인용되지 않음이 매우! 아쉽다고나 할 것이다.

여기서, 부란(剖卵)의 (剖)[pou, 퍼우]는, 쪼개다, 깨뜨리다의 뜻이나,

우리 말 발음의 부숴 뜨리다(break)가 살아 있다고 본다.

3)-*****(命) (駕) 순행 남하로(巡行 南下路)

유 부여 엄리대수(由 夫餘 奄利大水), 왕 임진 언왈(王 臨津 言曰),

아시(我是) 황천지자(皇天之子) (母) 하백여랑(河伯女郞) 추모왕(鄒牟王),

위아 연가(爲我 連葭), 부별응성 즉(浮鼈 應聲 卽) 위연가(爲連葭)

부별(浮鼈) 연후 조도(然後 造渡) 어비류곡(於 沸流谷)

홀본서성산상(忽本西城山上) 이 건도언(而 建都焉):

통상적인 해석은,

~이 명하여, 수레가 남으로 내려와,

부여의 [얀리](奄利)대수를 거치는데, 왕이 부두에 임하여 말하기를,

나는 하늘의 아들로,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신, [쩌우뭐우]왕이니,

나를 위해, 갈대를 이어라.  물에 뜬 자라가 그 소리에 응한 즉, 갈대를 이었다.

물에 뜬 자라는, 그런 뒤에, (강을) 건너게 하여, [얀리]의 동쪽, 비류곡의,

[후뻔](忽本)의 서쪽성 산 위에 이르고, 그래서, 도읍을 지었느니라.

자기 소개에서, 아시(我是) 추모왕(鄒牟王) ~~~으로 글 순서를 바꾸면 어땠을까? 

황천과 하백을 더 강조하려 그랬을까?

(我)[wo, ]는 우리 말의 위에서 내려온 (사람)= 나이다.

(是)[shi, ]= [yue, 유에]+疋[pi, ], 우리 말의, ~으로+말을+하자면 이다. 

해서, [워스](我是)는 나로 말을 하자면, ~~이다가 된다.

이 구절은, 왕이 부두에 이르러, 위엄을 보이면서,

자라들, 말하자면, 갯가의 사람과 배들을 서둘러 징발하여,

[yanli, 얀리](奄利)대수, 즉 동요하(東遼河)를 건넜다는 것이니,

사전에 순행 준비가 제대로 안됐다는 말씀이고, 무엇엔가 쫓긴 것을 그대로 나타낸다.

[얀리]는 지금의 압록강(鴨綠江)[yalujiang, 야뤼쟝]이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한번 건너왔다가, 되돌아서, 만주 땅의 [huben, 후뻔](忽本)으로

다시? 갔다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그리고, [얀리]가 속한, 부여는 분명히! 만주 땅에 있는 것이다. 

이때, [쩌우뭐우](鄒牟)왕은 부인들을 대동했을까? 

어머니인 유화 부인, 그리고 수수께끼의 송씨 부인과, [chuben, 추뻔](卒本)부여에서

다시 얻은(娶), 소서녀(召西奴)[zhaoxinu, 짜오씨누]= 첫 솟은 여인 등을? 

---수레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순행을 ~이 명했다는데, 누구의 명일까?  

유화 부인일까?  또는, 하늘일까?  아마도, 하늘이라 했을 터이다.

---어찌 됐든, 나 같으면, 왕이 자신을 설명 하기도 전에, 물에 뜬,

자라(浮鼈)들이 미리 알고서, 물위로 펄펄 뛰며, 왕의 일행을 모셨다고, 간단히 썼을 것인데. 

그래야만, [쩌우뭐우](鄒牟)의 성덕이 입증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 말의 +레 (말, 사람이 메거나 끌고서 높이)+솟아+올라 타는 것 이고,

(駕)[jia, ]는 우리 말의, 솟아 올라 (타는 것)이다. 

---이것은 갈대의 가(葭)[jia, 쟈]와 그 발음이 같다!

(浮)[fu, ]와, 자라 별(鼈)[bie, 삐에]의 발음은 우리 말의, , 뭍과 통한다. 

= .  , 여러, 갯가의 사람들이 동원됐다는 말씀이다. 

참고로, 일본의 [마쓰리](祭)에서는, [おみこし, +미+꼬+시](御輿)라는

수레가 등장한다. 우리 말의 위ㅅ+메고+끄는+솟은 것이다. 

[이미지]에서처럼, 많은 이들이 그 수레를 메는데,

이 구절에서 나오는, 뭇 자라, 뭇 사람들이 연상된다.

해서, 연가(連葭)[lianjia, 리앤+쟈]도 갈대를 잇는 것이 아니라,

실은, 우리 말의 (수레를 메어) 올려+솟게 하는 것이 아닐까?

위연가(爲連葭)에서의, 위(爲)[wei, 웨이]는 ~을 하다이다.

난해한 것은, 위연가(爲連葭) 다음의 부별(浮鼈)[푸삐에]의 존재이다.

이것이 연후조도(然後 造渡)의 주어일까?

문맥을 보면, 그 이후의 주어는 [쩌우뭐우](鄒牟)왕인 듯도 한데? 

혹은, 위연가(爲連葭)의 주어로서, 도치법을 쓴 것일까?

한편, 강을 건너는데, (渡)의 한 글자면 충분할 터인데,

, 굳이, 조도(造渡)라고 했을까?  (渡)가 여기서 명사일까?

그럴 경우, 뒤의 문장, 어 비류곡(於 沸流谷)으로 너무 비약하게 된다.

또한, (渡)가 동사라면, 그 뒤에, 건너는 (江)이 나와야 하는데,

없는 것을 보면, 포괄적인 자동사(自動詞) 같기도 하다.

해서, 나는 여기서의 조(造)[zao, 짜오]는 한자 뜻처럼, 짓다가 아니라,

우리 말 발음의! 좇아 이고, 도(渡)[du, ]도 따라서로 보려 한다. 

허면, 무슨 말이 될까?

뭇 자라들, 즉, 뭇 사람들이, 그런 뒤에, 좇아 따라서! 도읍을 지었느니라가 된다.

도읍을 짓는 데에는, 일손도 많이 필요하고, 여러 사람이 그처럼 자발적으로 따르고 좇아, 짓기까지 했다는 것은, [쩌우뭐우](鄒牟) 왕의 성덕을 흠모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 풀이는, 주어(主語)의 문제를, 가장 합리적으로 해결할 뿐만 아니라, 이 비문에서,

우리 말이 결정적인 부분에 쓰여졌을 가능성을 보인다.

(3)  추모왕의 최후.

어느 나라건, 자기네 첫 국조(國祖)가, 그 마지막도 또한 태평하고 훌륭하기를 바란다.

헌데, 만일에 실제가 그렇지 못했다면, 이를 어찌 기록해야 할까?

설령, 그래도, 장엄하게 묘사해야 할 것이다.


- 어느 작가의, 패배자(The Loser)의 [이미지].

[쩌우뭐우](鄒牟)왕의 느낌이 이랬을까? 온 몸을 꿰뚫는 아픔이라니! -

4)-불락세위(不樂世位) 인견(因遣) 황룡내하 영왕(黃龍來下 迎王),

왕 어홀본동강(王 於忽本東岡) 이용수 승천(履龍首 昇天):

통상적인 해석은,

즐겁지 못한 세상에서, 또는 자리에서, 황룡이 왕을 맞으려 내려오기에,

왕은 [후뻔]의 동쪽 기슭에서, 용머리를 딛고 승천하셨다.

정복자 [쩌우뭐우](鄒牟)왕의 최후인데, 여러 정황으로 봐서,

새로운 정복자, 유류(儒留王)[ruliu, 루릐우, 혹은 릐우리]= 내려온+오른에게 패퇴!

하고서, 실은, [후뻔](忽本)의 동쪽으로 쓸쓸히 사라지는 모습이다.

이후 얼마 동안, 고구려의 왕들은, [루릐우]왕의 계파와 [쩌우뭐우]왕의 계파로 나뉜다. 

그렇다면, 불락세위(不樂世位) 한자의 훈(訓)대로, 

즐겁지 못한 세상이라고도 볼 수는 있다.  과연, 그럴까?

(世)의 훈(訓)은 세상, 인간, 대(代), 서른 해, 날(生) 등이다.

(位)는 자리, 바를, 벌릴, 방위(方位) 등이다.

내가 이 구절의 풀이에 대해, 이상하다고 의심을 하게 된 단초는,

문맥으로 봐서, 굳이 없어도 되는, 인견(因遣)의 존재 때문이다. 

, 누가! (황룡을) 보냈기에 ~~라는 것이다.  그게 과연 누굴까? 

전체 문장의 주어를 왕으로 보자면, 왕이 스스로 이제는 재미있는 일도 없으니,

나를 그만 데려가라고 황룡을 불렀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이 부분은 2개의 문장이 이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불락세위(不樂世位)즐겁지 못한 세상이라면, (位)는 없어도 되는 글자이다.  운(韻)을 맞추려 썼을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혹시, 불락세위가 앞 문장의 주어요, 명사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해서, 나는 그것이 바로, 우리 말의! 

불락세위(不樂世位)[buluoshiwei, +뤄+쓰+웨이]=밝은, 높게+올라+솟은+윗,

즉, 하늘의 상제(上帝)라 본다. 

그러면, 전체의 뜻은, 밝고 높게 올라 솟은 윗 (상제)께서, 황룡을 내려 보내시기에,

용을 타고 (아쉽게도!) 승천하셨다.가 된다. 

그래야만, 시조 [쩌우뭐우](鄒牟)왕의 신통한 성덕을 기리면서, 그 덕이 후대에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장수왕이 자기 부친, 광개토왕의 비를 세우는 마당에, 굳이, 시조 [쩌우뭐우](鄒牟)왕의 즐겁지 못한 억울함까지, 비문에 쓸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국인들이라면, 용으로 변해서 승천하셨다고 할 것이나, 고구려인들은 그런 허풍은 떨지 않았으니, 그 실질적인 기풍을 가히 짐작하실 수 있을 터이다.

어쨌든, [뿌뤄쓰웨이](不樂世位)는 우리 말 발음이라는 말씀이다.


-어느 작가의, 승천(昇天, Ascension)의 [이미지].

[쩌우뭐우](鄒牟)왕= [까오떵](高登)신의 혼백은, 후손의 아쉬움 속에, 이렇게 하늘로 올라갔을 터이다. -

역사가 묘한 것은, 기존의 힘 센 곳에서 보기에는, 뜻하지 않은 곳으로부터,

새로운 것이 왕왕 튀어 나온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복자, 유류(儒留王)[ruliu, 루릐우]의 등장이, , 그러하다.

5)-고명세자(顧命世子) 유류왕(儒留王) 이도(以道) 흥치(興治),

대주류왕(大朱留王) 소승기업(紹承基業):

통상적인 해석은,

선왕의 유언을 부탁 받은 세자, [루릐우]왕은 도(道)로써, 잘 다스렸고,

(다음의) 대주류왕은 그 밑바탕의 대업을 이었다.

이 부분은, 감정을 억누르고, 여러 사정들을 압축 표현한 것이다.

구 자일 박사에 따르면, [루릐우]왕의 어머니, 예(禮)[리]씨는, [쩌우뭐우](鄒牟)왕의 첫째 부인이 아니라고 한다. 부러진 칼이 후계자의 징표라 했으나, 이는 다르게도 해석될 수 있다. 

[루릐우]가 [쩌우뭐우](鄒牟)를 그 칼로 찔렀다던가?  어쨌든, 두 왕들은 서로 남남이었다.

---굳이, 고명세자(顧命世子)라는, 친절한 표현을 쓴 것은,

역사의 단절을 보이지 않게 하려 함이 아닐까?

[루릐우]는 심지어, [쩌우뭐우]왕의 부인 [쑹](松)씨를 빼앗고, 태자였던 도절(都切)을 죽게 했다.  [쑹]씨 부인은 3년 만에 죽었다고 돼있으나, 실은, 그 훨씬 이전에 [쩌우뭐우]의 아기를 가진 채, 부여의 해명(解明)에게 도망갔다 하고, 그래서 낳은 [쩌우뭐우]왕의 유복자(遺腹子)가, 3대 왕, 대주류왕(大朱留王), 즉, 대무신왕(大武神王)이라는 것이다. 

대주류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 양아버지 해명(解明)은 [루릐우]의 핍박으로 자살했다 하고, [루릐우]의 아들, 여율(如栗)[ruri, 루리], 또 그의 아들, 막래(莫來)[molai, 머라이]도 일찍 죽는다.  [쩌우뭐우](鄒牟)왕의 부인, [짜오씨누](召西奴)는, [쩌우뭐우]의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미리 도망쳐서, 어라하(於羅瑕)[yuluoxia, 위뤄샤]= +올라+솟은 곳을 세우고,

스스로, 그 우두머리 어하라(於瑕羅)[yuxialuo, 위샤뤄]= +솟아+오른 이가 되었으며,

[쩌우뭐우]의 사당을 모셨다.  그것이 바로, 백제의 출발이다. 

정작, 고구려에서는, 대주류왕(大朱留王)이 등극하기 전에는,

, 나라의 기업(基業)을 잇기 전에는, [쩌우뭐우](鄒牟)왕의 사당이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광개토왕과 장수왕은 [쩌우뭐우]왕 계열일 것이나,

그래도! [루릐우]왕을 이처럼 비문에 한 줄 기록했다. 

혹시, [루릐우]왕 계열인, 소노부(消奴部)의 만만치 않은 세력 때문이었을까? 

[루릐우]왕의 (道)는 이러했다. 

허나, 백성들을 잘 살게 했다면, 그 또한, (道)라 할 것이다. 

역설적인 얘기이나, 만일, [루릐우]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우리 역사에서 백제는 아예 없을 뻔 했다. 지금의 일본 모습도 물론, 없었을 것이고.  고구려의 초기 역사는, 이처럼 무자비한 왕들끼리의, 피 튀기는 약육강식의 시대였다는 말씀이다.

---우연하게도 묘한 것은, 비슷한 시기의 [로마]에서, [씨저](J. Caesar, BC100~44)가 암살된 후, 잠시, [안토니우스](Antonius) 시대를 거쳐, [씨저]의 조카이자 양자인,

[오거스터스](Augustus, BC63~AD14), 초대 [로마] 황제에 이르는, 그래서, [로마]가 거듭! 태어나는, 그 역사의 과정과 닮았다는 것이다.

(4)  광개토왕의 생몰(生歿).

잘 알려진, 어느, 심리학 연구에, 공간(空間)을 줄여갈수록, 그 공간 속에 들어 있는,

개체(個體)들이 점점 더, 공격적이 되고, 포악해진다는 결과가 있었다.

최근의 신문 보도에서, 눈에 띄게 드러나는, 각종 폭력과 시위 현상들은, 소위, 빈곤양극화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이는 공간의 축소에 따른, 숨 막힘의 두려움 때문이라 보여지며, 더 넓은 세상을 포기한, 계산되지 않은 행위라 할 것이다.

헌데, 누가 이토록, 공간을 답답하게 압박하고 있을까?

광개토왕은 그래서, 우리의 숨통을 틔워주는, 청량한 존재이시다.


-미술 해부학 전문가, 조 용진 교수의 형질 인류학 연구를 바탕으로, 어느 미대 교수가 제작했다는, 구리시 소재의 광개토대왕 동상의 [이미지].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으나, 그리고, 구리 시민과 고구려 연구회에게는 미안하지만,

한 마디 안 할 수가 없다. 얼굴 모습의 복원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부분에는 문제가 있다는 말씀이다. 우선, 동북아의 지배자를 나타내는, 구체적 상징이 그 어디에 보이는가?

이상한 관(冠)의 모양- 고증을 거쳤는지조차 의심되는-, 그리고, (馬)이 빠진 것, - 설령, 지배자의 관용과 평화를 보인다 해도-또한, 누가 봐도, 잘 알려진 예수님의 그림이나 조각상의 자세를 표절한 듯한, 손과 팔의 모습, 특히, 이런 자세의 경우, 시각(視角)방향, 해석상의 문제가 되는 것, 등등.

비록, 예산도 딸리고, 역량 있는 조각가를 찾기가 힘들었을 것이라 이해되지만,

그렇더라도, 이 동상은 혹여, 왕을 욕되게나 하는 것은 아닌지?

또 하나의, 졸속과 허세를 보는 것 같아, 입 맛이 쓰다. -

6-1)-*(至) 십칠세손(十七世孫)

국강상(國岡上) 광개토경(廣開土境) 평안(平安) 호태왕(好太王)

이구등조(二九 登祚) 호위영락태왕(號爲 永樂太王)

은택*천(恩澤*天) 위무**사해(威武**四海) 소제**서녕(掃除**庶寧)

기업(其業) 국부민은(國富民殷) 오곡풍숙(五穀豊熟):

통상적인 해석은,

~에 이르러, 17세손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은,

18세에 왕위에 솟아 오르니, 호를 영락태왕이라 했으며,

그 은택이 하늘에 닿고, 그 위무는 사해에 떨쳤으며, ~(도적)을 쓸어내어 백성을 편히 했고,

그 업적으로, 나라와 백성을 부강하게 했으며, 오곡이 무르익었다.

우선, 광개토왕은 19대 왕이다. 헌데, 17세손(十七世孫)이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 사이의 형제 항렬을 따지자면, 13~14세손이 돼야 한다.

허면, 중간의 누구를, 이를테면, [루릐우](儒留王) 등을, 내심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얘기일까? 헌데, 손자라는 (孫)을 썼으니, 대충 넘어갈 수도 있겠다.

그리고광개토왕의 길다란 이름에, 그 잘난, 중국의 벼슬 이름들이 포함되어 있는가? 

나는 없다고 본다!  모두, 우리 말의 것들이다. 따라서, 광개토왕의 이름은 그 하나하나가 우리 말들이고, 당시 비슷한 발음의 한자로 기록한 것으로 본다.

국강상(國岡上)[guogangshang, +깡+쌍]= 크게+거느려+솟은 이로,

광개토경(廣開土境)[guangkaitujing, +카이+투+징]=

크게 오른+가운데의+돋은 터를+지으시고,

평안(平安)[pingan, +안]= (이를) 밝고+오르게 하신,

호태왕(好太王)[haotaiwang, 하오+타이+왕]= 해 오른+돋은 터의+윗 오른 이(= 왕)이다.

호를 영락태왕(永樂太王)[yongluotaiwang, +뤄+타이+왕]이라 했는데, 이것 역시, +오른+터의+왕이다. 

태왕으로 부른 경우는, 전체의 비문에서 단 2번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으로만 불렀다.  따라서, 호태(好太)[하오타이], 영락태(永樂太)[융뤄타이]는 각각, 해 올라 돋은 터윗 오른 터라는 것이다.

거듭, 말씀 드리거니와, 한자의 뜻은 무의미하다.  또한, (號)라고만 했지, 년호(年號)라고는 하지 않았다.  해서, 년호의 뜻으로서의, 영락(永樂)[yongluo, +뤄]는, 차라리, 우리 말의, 윗에 오르신지, ~년으로 볼 수도 있다.

부디, 왕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라. 왕의 자리에서, 좋고(好), 즐겁다(樂)가 무슨 큰, 의미가 있는지를!---왕은 그렇게, 외눈박이 책상 물림들이 오해하듯, 놀고 누리기만 하는, 그런 의미 없는, 한가한 자리가 아니다.  국강상(國岡上)[꿔깡쌍]의 경우에도, 설령, 유사한 한자의 관습적 호칭이 있다 하더라도, 그 근원되는 발음은 우리 말이다.

6-2) 호천 불조(昊天 不弔) 삼십유구(三十有九) 연가 기국(宴駕 棄國),

이갑인년(以甲寅年) 구월이십구일(九月二十九日) 을유(乙酉),

천취산릉(遷就山陵), *입비(於*立碑) 명기훈적(銘記勳積)

이시후세언(以示後世焉), 기사왈(其詞曰):

통상적인 해석은,

하늘도 무심하게, 39세에 왕의 수레는 나라를 버리셨다. 

그래서, 갑인년 9월29일 을유에

산릉을 옮겨 짓고, ~(앞)에 비를 세워서, 그 훈적을 새기어

후세에 보인다.  그 말씀은 이와 같으니.

여기서, ~ 산릉을 ~ 문장의 주어는 장수왕(長壽王)일 터이다.

다른 내용은, 그렇게 특별할 것이 없으나,

다만, 호천불조(昊天 不弔)[haotianbudiao, 하오티앤 뿌댜오]에서,

[뿌댜오](不弔)는 매우! 이상하다. 

한자의 훈(訓)으로는, (넓은, 또는 서쪽의) 하늘이 조상(弔喪)하지 않다,

또는, 매달지 않다 이다.  혹은, 하늘에 조상도 못하시고, 그만 ~일까? 

허면, 하늘에 조상~이라니, 그게 제천(祭天)일까?

허나, 제천 행사를 (弔)로 표현할 수는 없고, 아무리 꿰 맞추어도, 도무지 어색하다. 

해서, 나는 [budiao, 뿌댜오](不弔)가 우리 말의 발음, 붙들어, 또는 문득 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 내용은 이렇게 명료하게 된다. 

하늘이 붙드시어, (또는 너른 하늘에 문득),

39세에, 왕의 오르신 수레는 나라를 버리게 됐노라. 

여기서의 [yan, ](宴)은 우리 말의 오르신이다.

나는 이 구절이, 우리 말 발음을 쓴, 또 하나의 사례라고 본다.

어쨌든, 모든 것은 천명(天命)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왕을 거역함은, 하늘의 뜻 또한, 거역하는 것이 된다는 얘기가 된다.

---왕도 왕 나름이라 하겠지만.

(5)/ 말도 많은 신묘년(辛卯年).

역사 유적과 유물의, 수집과 보존, 두 말할 것 없이, 중요하나, 실제로 필요한 것은 이들의 해석이다.  왜 그럴까?---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현재와 미래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글부터는, 광개토왕의 대외 업적으로 들어 간다. 그 업적을 살피면, 나라 사이에는,

오로지, 현실적인 국익(國益)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이 왜? 같은 민족인 백제와 신라를 차별했을까?

왕은 실리와 실용주의를 따른 것이고, 힘을 키웠으며, 그래서, 성공했다.


- 광개토왕 비문의, 소위, 신묘년조(辛卯年條)가 표시된, '변조' 부분의 [이미지]. -

7)-영락오년(永樂 五年) 세재을미(歲在乙未)

(王), 이비려(以裨麗) 불식(不息)**,

궁솔왕토(躬 率往討) 회부산부산(回 富山 負山) 지염수상(至鹽水上)

파기구(破其丘) 부락육칠백영(部落 六七百營)

우마군양(牛馬群羊) 불칭기수(不稱其數) 어시선가(於是 旋駕)

인과(因過) *평도(平道) 동래(東來) *성(城) 력성(力城) 북풍(北豊),

왕비렵유(王 備獵遊) 관토경(觀土境) 전렵이환(田獵而還):

통상적인 해석은,

영락 5년은 세수로는 을미년이다. 

왕은, 비려(裨麗)가 ~을 그치지 않으매,

몸소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러 갔다.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돌아서,

염수(鹽水)의 윗 쪽에서, 그 언덕의 부락 6,7백 막사를 부수었다. 

소와 말, 양의 떼는 그 수를 말할 수 없다.  이에 수레를 돌리고,

(망)평도, 동래, ~성, 력성 및 북풍을 지났기에,

왕은 사냥과 시찰을 준비했는지라, 터의 경계도 돌아 보고, 사냥을 하며, 돌아 왔다.

우선, 왜? 업적을, 영락 1년부터 시작하지 않고, 영락 5년부터 얘기를 했을까?

나는, 왕이 궁성을 벗어나, 실전에 첫 참가한 것, 바로, 이때부터라고 본다. 

해서, 순서의 표현이 모호하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비려(裨麗)[beili, 뻬이리]= , 높은, 북쪽의+오르는 곳의 사람은 선비(鮮卑)족이다. 

고구려의 서쪽, 혹은 서북쪽에 있었다. 

훗날, 이 선비족의 후예를 지도자로 하는, [탕](唐)에게 나라를 앗기니,

이 무슨, 역사의 기묘한 조화(造化)란 말인가? 

염수(鹽水)[yanshui, 얜쑤이]는, 지금의 요하(遼河)[liaohe, 랴오허]이다. 

[yan, ](鹽)은 (해 솟아) 오르는 이다.  소금의 발음 뜻도 같다. 

강을 건넜다는 말이 없으니, 보기(步騎)만으로 정벌을 한 것이다. 

전렵의 전(田)[tian, 티앤]은 전(畋)[티앤]= 같이, 떼로 하는, (사냥)이다. 

발음은 같이, 떼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부산(富山) [fushan, 푸싼]과 부산(負山)[fushan, 푸싼]은, 혹시,

지금의 요녕(遼寧)성 부신(阜新)[fuxin, 푸씬]이 아닐까? 

[fu, ]는 우리 말의, , 높이다. 

동래(東來)[donglai, 뚱라이]는 돋아 오르는 곳이고,

(力)[li, ]는 오르는 곳이며,

북풍(北豊)[beifeng, 뻬이펑]은 , 높은+밝은 곳이다.

모두, 우리 말의 발음들이다.

8)-백잔신라(百殘新羅) 구시속민(舊是屬民) 유래조공(由來朝貢)

이왜(而倭) 이신묘년(以辛卯年) 래 도해(來 渡海) 파백잔(破百殘)

***라(羅) 이위신민(以爲臣民) **:

말도 많은 [미스터리]의, 소위 신묘년조(辛卯年條)이다.

역사 왜곡을 바로 잡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는, 유명한 부분이다.

훼손된 글자 때문에, 이것의 해석은 아직도 완결되지 못했다.

통상적인, 아니, 일본측의 해석은,

백제나 신라는 옛 속민이라 조공을 해왔는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 그리고 (신)라를 부수어, 신민~으로 삼았다.

일본이, 이를 몇 년씩 연구하여 변조하고, 한반도 침략의 근거로 발표했던 것인 만큼, 문제가 간단하지가 않다.  일본은 이 구절을 근거로,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했으므로-

한반도에서 무슨 일이 나면, 바다를 건너 와서,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하며,

그 사례로? 소위,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것을 내세운다.  

허나, 당시의 왜(倭)는, 나중에 다시 말씀 드릴 것이나,

백제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고 보여지므로, 그 어느 것이든,

모든 상황은, 백제가 왜인들을 내세워 움직인 것이라고 봐야 한다.

백잔(百殘)[baican, 빠이찬], 즉, 백제(百濟)[baiji, 빠이+지]= 밝은+(해) 솟은 나라, [can, ](殘)= 우리 말 발음의, 조각을 낼, 나쁜 것이라 함은,

선대의 고국원왕이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피살된 원한 때문이다. 

[찬](殘)은, 여기서, 나머지라는 한자 뜻이 아니다! 

오히려, 적개심의 대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 백잔(百殘)[빠이찬]을,

, 밝은 뭐라? 이런, 조각을 낼, 나쁜!이라 했을 터이다. 

따라서, 이 [찬](殘)이라는 글자 하나로 인해서, 무슨, 속민이고, 조공이고, 하는 따위의 가벼운 말들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숱한 다른 해석들이 있으나, 여기서 일일이 옮길 수는 없겠다.

첫째, (倭)(海)의 문제이다.

일본측의 주장대로, 만일, 가 영락 1년에 백제 등을 부수어, 조공을 못하게 했다면,

고구려는 를 먼저 공격해야지, ? 영락 6년에 엉뚱하게 백제를 공격했을까?

---[타겟](target)은 어디까지나! 백제라고 본다.

어느 분은, (倭)[ai, 아이]= (해) 오르는 , 부여(夫餘)[fuyu, 푸위]= 밝은, 높은 윗 을 뜻한다고도 했다.  우리 말 음운으로는 굳이 연결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허나, 국호로는 분명히 서로 다르고, 만일, 그것이 부여라면, 영락 20년의 동부여 얘기에나 나와야 한다. 헌데, 광개토왕을 기리는 글이라서, 왜(倭)는 주어(主語)가 될 수 없다는 분도 있으나, 다른 부분에서 보면, 왜나 동부여도 주어가 됐으니, 그 논리는 냉정하지 못하다.  차라리, 백제가 공격의 빌미를 주었고, 여기서는, 가 아직은!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 옳다고 본다. , 비문의 (倭), 어떻게 보더라도, 변조된 글자이다!

한편, (海)는 변조된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 

청명본(靑溟本, 1889년)의 원석 탁본에는, 도해(渡海)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渡)라는 글자가 믿을 만하다면, 그 뒷 글자의 정체는, 그것이 해(海), 강(江), 수(水)든 뭐든, 어떤 경계를 뜻하기만 하면 된다.  아마도, 일본인들은, 순진하게도!

그 변조된 (海)가 물 건너, 부각시키리라고 착각했을 터이다.

둘째, 래도해(來)의 문제이다.

우선, 이 비문은 전체가 년대순(年代順)이다.  허면, 왜, 느닷없이,

신묘년= 영락 1년(= AD 391년)이 영락 5년 다음에 나오는가? 

허면, 이 신묘년조(條)는 영락 6년의 백제 침공을 위한,

명분과 사유 및 개요를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를 앞의 이신묘년과 합쳐,

(以)신묘년+래(來)로 해석할 수 있지 않는가? 의 문제이다. 

(以)[yi, ]= [bing, ]+[jiu, ]+[ren, ],

우리 말의, 무엇을+써서+오르게 하여+이루는쓰다(用)의 뜻이고,

이 경우의 (來)[lai, 라이]는, 우리 말 발음의, ~로부터 이다. 

, 이래(以來)라는 것이다.

한편, AD (391~)392년, 고구려는, 백제의 석성(石城), 관미성(關彌城) 등 10성을 공략했었고,

백제는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고로, 관미성, 지금의 충청도 아산 반도의 끝,

또는, 만주의 요동 반도의 끝으로 보는 견해가 다투고 있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나는 뒤의 견해를 지지한다. 

(石)[shi, ]은 우리 말의, 솟은 성이다. 

관미(關彌)[guanmi, +미]는 끝의+밑 성이다. 

셋째, 문제는, 백제, 당시의 지배 체제가 일심동체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AD 660년, 백제 멸망 직전, 는 나라를 거덜 낼 정도로 대병력을 지원했는데,

왜 그랬을까? 그때까지도, 실질적으로는, 같은 지배 체제였었다는 말씀이다.

백제는 실로 강성한 나라였었다.   

구 자일 박사에 따르면, AD 391년, 에 있던 백제왕, 침류왕(枕流王)이,

한반도의 백제왕인, 전지왕(腆支王)을 아신왕(阿莘王)으로 바꿨는데,

이를 가 백제를 깨부순? 것으로도 해석할 수도 있다고 했다. 

허나, 가 같은 해에 신라를 부쉈다? 하는 것은,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넷째, 유래조공(來), (未) 또는 (不)이라는 글자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는 서 영수 교수의 날카로운 지적이다. 

혹은, 그 다음의 이왜(而倭)이절(而絶)이라고도 했다. 

앞의 것(未, 不)은, 조공을 하지 않아서이고,

뒤의 것(絶)은 조공을 하다가 그쳐서이다.  

(而)[erh, ]은 그리고, 그리하여, ~에, 너(you), ~과 같을, 이에(乃),

접속사 및 어조사 등의 뜻으로, 그 앞의 말과 논리적으로 연결돼야 한다.

따라서, 이왜(而倭)는 돌연한! 표현이므로, 지극히 이상한 것이다.

나는 우선, (由)來(由)未(= 조공을 하지 않아서)에 동의한다.

여기서의 는 백제를 공략해야 마땅한 까닭을 보이는 것이다.

참고로, 우리 말의 +닭, (무엇을) 그렇게+돋아+오르게(= 되도록)+일어나게 한 것이다.

중국어의 (由)[you, 여우]= [gun, ]+[yue, 유에],

우리 말의, 그렇게+오르게+일어나게 한이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이라는 주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복합적인 상황이라서 그랬다고 본다.

만일 (倭)가 변조됐다면, 그것의 원래 글자는, 사람 인()’변이 있는 글자가 유력하,

그것은 ‘백잔신라(百殘新羅)’의 어떤 못된, ‘공통점’이 되어야 한다. 

해서, 나는 그것이, ‘오만할 오(傲)’라고 봤다.

다섯째, ***라(羅)**신라는 아니라고 한다. 

그럴까?  이 비문 전체에서, 고구려가 신라를 왜(倭)로부터 구했어도,

신라를 적으로 삼아 공략한 구절은 단 한군데도 없다! 

허면, ***라(羅)가 혹시, 임나가라(任那加羅)일까? 

헌데, 임나가라는 영락 10년에나 나와야 한다.

따라서, 그 앞에서, 이신묘년래가 되면, 말은 된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의 조공 문제에, 갑자기! 임나가라가 끼어들어 등장하는 것도 이상하다. 

헌데, 만일, **신라라면, 이것의 **(破)와는 다른 뜻의 동사,

이를테면, 복속(服屬)같은 것이 되면, 말이 되지 않을까?

여섯째, 이 비문에는, 왕이 몸소(躬),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경우와, 지시만을 하는 경우가 구분되어 있다.

---참고로, 우리 말의 +소(스스로) 몸을+숙여 굽히시어이다.

중국어의 (躬)[gong, ]= [shen, ]+弓[gong, ],

우리 말의, 스스로+굽히시어이다.  일본어의 [, ](躬)는 몸소이다.

앞의 경우에는 왕궁솔(王躬率), 뒤의 경우에는 견(遣), 또는 교견(敎遣)을 썼다. 

헌데, 두 가지를 다같이 표현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까? 

다른 한자를 골라서 썼을 것인데, 나는 그와 같은 경우,

이를테면, (渡)~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말하자면, (渡)~는 여러 사건들을 포함한 객관적 표현으로,

앞에서의 ~래(以~來)라는 표현이 그래서 자연스럽게 성립한다.

(渡)[du, 뚜]= [shui, 쑤이]+度[du, ],

우리 말의 솟은 (물) 위를+(넘어, 건너 쪽에)+닿다이다.

일본어의 [わたる, +다루](渡)는 넘어+닿다이다.

, 도(渡)의 대상은 은 물론, 경계를 건너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이 문제점들을 감안하여, 내 나름의 문장으로 감히, 복원해 봤다.

백잔신라(百殘新羅) 구시 속민(舊是屬民), 유 조공 이(由朝貢而),

이신묘년(以辛卯年), 도(渡) 파백잔(破百殘) 복속신(服屬新)

이위신민(以爲臣民) **

, 백제나 신라는 옛 속민이되, 아직, 조공도 하지 않고, 그리고, 오만한 까닭에,

신묘년으로부터(以來), 경계를 넘어가 백제를 부수고, 신라를 복속시켜,

신민~으로 삼았느니라.

여기서의 (界), 뒤에도 나오는, 백제의 대방계(帶方界)일 터이고,

전체 문장의 주어! 은 생략됐다고 본다. 

대방(帶方)[daifang, 따이+팡]은 돋아+밝은 곳이다.

또한, 신민(臣民)은, 속민(屬民)보다도, 지배 관계가 더 구체적인 듯 하다.

그러므로, 이 신묘년조(辛卯年條)는 실은,

신묘년(=영락 1년= AD391년) 이래 5년간의 얘기였다는 말씀이다.

나는, 이 구절의 복원이, 아직은, 완결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뒤에 말씀 드릴, 영락 10년, 경자년(庚子年)의, 무참히 훼손된, 왕의 (倭)의 본토를 정벌한 부분이, 제대로 복원되기까지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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