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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의 두번째 수도 유주 당장경은 낙양시 서쪽의 신안현 함곡관이다

백운선사 김대현 2018. 6. 4. 16:17

[단군의 두번째 수도 유주 당장경은 낙양시 서쪽의 신안현 함곡관이다. 후에 고구려 평양성 발해 현덕부성이 된다!]


원래 고구려의 궐구현(闕口縣)이다. 고려조에서 유주(儒州)로 고쳤는데, 현종(顯宗) 때에는 풍주(豐州)에 속하였으며, 예종(睿宗) 때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종(高宗) 때에 위사 공신(衛社功臣) 유경(柳璥)의 고향이므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령으로 승격시켰으며 본조에서 그대로 하였다.


구월산(九月山) 고을 서쪽 10리에 있으니 바로 아사달산(阿斯達山)이다. 다른 이름은 궁홀(弓忽)이요, 또 다른 이름은 증산(甑山), 삼위(三危)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檀君)이 처음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또 백악(白岳)으로 옮겼다’하는데 곧 이 산이다. 주 무왕(周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니, 단군이 이내 당장경(唐藏京)으로 옮겼으며, 후에 다시 이 산으로 와서 숨어, 화하여 신이 되었다 한다. 또 장련현 및 은율현 편에 보인다. 전산(錢山)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가을산(加乙山) 장장평(莊莊坪) 동쪽에 있는데 옛날 백령진(白翎鎭)이 이 곳에 임시로 와서 있었다.


용산(龍山) 고을 동쪽 1리에 있다장장평(莊莊坪) 고을 동쪽 15리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했던 곳이라 하며, 그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장장평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당장경(唐藏京)의 와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2권 > 황해도(黃海道) >문화현(文化縣


금나라때 거란지리도 유주는 원래 요나라연경의 서북쪽에 있다.

 

http://cafe.daum.net/manjumongolcorea/TwTv/85요나라의 연경성은 바로 고구려의 남소성관할로 발해 막힐부이며 옛 동평군이자 옛 요양이었다.

 

http://cafe.daum.net/manjumongolcorea/TwTs/215 암연현에 있는 엣 평양성이 바로 신안현의 한도이다.

 

고려와 조선은 고구려 발해땅을 완전히 수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의 땅을 자기땅안에 구겨넣었는데 그러다 보니 지명은 이동하되 실제 과거의 지명이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즉 고구려의 유주가 바로 당장경으로 단군의 도읍지 옜 평양성으로 지금 낙양(요나라 연경)의 서북쪽 한도(韓都)이다. 마한을 가리켜 옛 진국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마침 개주 진국군은 당나라기록에서 이 근방으로 나온다. 청나라의 기록에서는 개주진국군은 곧 개주촉막군(개경을 달리 부르던 말)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고구려때의 지명이 낙양일대가 개주였고 진국군과 촉막군이 있었다는 것이고 고려는 유주와 촉막군지명을 모두 복양일대로 옮긴다.


 (왜냐면 고구려땅이 자기땅안에 없다면 백성으로부터 전왕조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 터이니 실제로 고려사에는 고구려보다 동서는 짧아도 남북은 길다 남북만리의 대국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물론 남북 만리는 맞지만 동서의 길이는 택도없이 작았다.)

 

 

儒州,縉陽軍,中,刺史。唐置。後唐同光二年隸新州。太宗改奉聖州,仍屬。有南溪河、沽河、宋王峪、桃峪口。統縣一: 縉山縣。本漢廣寧縣地。唐天寶中割媯川縣置。戶五千。

요사 유주 진양군은 후당때 신주로 요나라 태종이 진성주로 개명했다. 진산현이 있는데 본래 한나라 광녕현이다.

 

광녕현성(廣寧縣城)
곧 금주부(錦州府)의 속현(屬縣)으로 옛 요서(遼西)의 땅이다. 한대(漢代)에는 망평루현(望平絫縣)이라 하였고, 당대(唐代)에는 무려도호부(巫閭都護府)라 하였고, 발해(渤海) 때에는
현덕부(顯德府)라 하였고, 요(遼) 때에는 현주(顯州) 봉선군(奉先軍)이라 하였다. 수위(守尉)ㆍ지현(知縣) 등의 관원이 있고 성의 둘레는 요성(遼城)과 맞먹을 정도다계산기정 제2권 > 도만(渡灣) ○ 계해년(1803, 순조 3) 12월[4일-24일] >

 

 《요사(遼史 원(元)의 탁극탁이 씀)》에,“발해(渤海)의 현덕부(顯德府)는 본시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한 평양성(平壤城)이던 것을, 요(遼)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東京)’이라 고쳤으니 이는 곧 지금의 요양현(遼陽縣)이다.”

 

광녕은 조선말기에도 발해 중경현덕부라고 알고 있었는데 발해의 중경현덕부가 바로 고구려의 평양성이다. 원나라에서 작성한 요나라지리지에는 유주즉 당장경이자 단군이 새로 옮긴 도읍지가 바로 기자의 평양성이라고 기록했다.

 


  營州,鄰海軍,下,刺史。本商孤竹國。秦屬遼西郡。漢為昌黎郡。前燕慕容徙都於此。元魏立營州,領昌黎、建德、遼東、樂浪、冀陽、<一九>營丘六郡。後周為高寶寧所據。隋開皇置州,大業改遼西郡。唐武德元年改營州,萬歲通天元年始入契丹。聖曆二年僑治漁陽。開元五年還治柳城。天寶元年改曰柳城郡。後唐複為營州。太祖以居定州俘戶。統縣一:廣寧縣。漢柳城縣,<二○>屬遼西郡。東北與奚、契丹接境。萬歲通天元年,入契丹李萬榮。<二一>神龍元年移幽州界。開元四年復舊地。遼改今名。戶三千。

요사

영주 인해군은 상나라 고죽국이고 진나라 요서군이고 한나라때는 창려군이다. 창려 건덕 요동 낙랑 기양 영구6개군을 다스린다.  현이 1개 있는데 광녕현으로 한나라때 유성현이다.

  http://cafe.daum.net/manjumongolcorea/TwTs/184 당나라영주인 유성일대는 화산일대

 

桓因桓雄檀君天帝 太三聖祖崇敎 國宗院

환인환웅단군천제 태삼성조숭교 국종원 


유성은 곧 조양이고 한나라 창려인데 사마천의 사기에 창려에 왕검성이 있다고 했으니 지금 위남시일대가 바로 왕검성이 있던 곳이고 단군이 도읍을 옮겼다는 유주는 곧 지금 낙양시 서쪽의 함곡관일대임을 알수 있다.

 


요나라의 기록대로라면 기자가 왔다는 고조선의 도읍지 평양성은 신안현으로 지금 함곡관이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사마천의 사기에서 쓰인 왕검성즉 창려의 왕검성은 당시 한나라가 위만조선과 싸워 이기고 점령한 위만조선의수도라는 것이다. 

 

고신의 손녀사위인 단군왕검은  위남시에 도읍했다가 낙양의 신안현으로 옮긴 것이고 기자가 오자 다시 동쪽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유력한 후보지가 바로 하남성 정주시로 고구려의 남평양성이다.

 

 

 


단군의 유주 당장경성이며 기자의 수도이자 고구려의 평양성이며 발해 현덕부성이며 요나라의 구요양현후에 연경성외곽의 성이며 금나라의 연경성 외곽성 원나라의 대도성 외곽성 명나라의 중기 북경외곽성이 되는  지금 한나라 함곡관으로 알려진 신안현의 고성

   

 

 


중국 하남성 홍농(弘農) 함곡관(函谷關)


우리나라 성씨인 남양홍씨나 장흥위씨를 비롯한 많은 성씨 들이 당나라시대 중국 홍농에서 8학사로 들어왔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제나라 맹상군의 계명구도(鷄鳴狗盜)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진 함곡관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며, 노자가 도덕경을 지은 곳이기도 하다.


전국시대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맹상군의 집에는 무려 3천여 명의 식객이 있었다. 식객이란 말 그대로 밥을 얻어먹는 사람인데 식객으로 있던 사람들의 면면이 더 놀랍다. 글 읽는 선비도 있었지만 문서 사기범, 도둑, 그리고 동물 소리를 흉내 내는 등 천한 기예를 자랑하는 이들도 있었다. 맹상군이 그런 이들을 식객으로 거느린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날 진(秦)나라 소왕(昭王)의 부름을 받아 여우털로 만든 호백구(狐白裘)를 선물했다. 소왕은 맹상군을 재상으로 임명하려 했지만 많은 신하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한편 맹상군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음모를 알아차리고 소왕의 애첩 총희(寵嬉)를 달래 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하니 호백구를 요구하였다. 개 흉내로 도둑질에 능한 사람이 “신 이 능히 호백구를 얻어 오겠습니다.” 하고 밤에 개 흉내를 내어 진나라 궁의 창고로 들어가서, 바쳤던 호백구를 취해서 그녀에게 주니 그녀의 간청으로 석방되었다.
 
그 곳을 빠져 나와 밤중에 함곡관에 이르니 닭이 울어야 객을 내보낸다는 법으로 객중에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자가 '꼬끼오' 하니 모든 닭이 따라 울어 관문이 열렸고 무사히 통과하여 제나라로 올 수 있었다. 나중에 소왕은 맹상군의 귀국을 허락한 것을 뉘우치고 병사들로 하여금 뒤쫓게 했으나, 이미 함곡관의 문을 통과한 뒤였다. 함곡관은 지금도 보면 험난하지만 2천년 전에는 몇 백명의 병사로 100만 대군을 막을 수 있는 곳이라 하였다.
 
지금은 많이 메워져 있어 그리 깊지는 않지만 커다란 관문임에 틀림이 없다. 홍농을 지금은 영보시(靈寶市)로 부르고 있으며, 2천 년 전에는 서안과 낙양 중간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곳이자 닭 울음소리를 냈다는 계명대도 있다.
 
이곳은 노자가 도덕경을 지은 곳으로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안으로 들어가면 노자의 동상이 크게 만들어져 있으며, 도덕경이 큰 글자로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상선약수란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즉 몸을 낮추어 겸손하며 남에게 이로움을 주는 삶을 비유하는 말이다.


장흥에는 장흥위씨 사당인 하산사(霞山祠)가 있다. 이곳으로 들어가는 곳에 상선약수라는 비석이 있다. 물은 온갖 것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살 때는 물처럼 땅을 좋게 하고, 마음을 쓸 때는 물처럼 그윽함을 좋게 한다.
 
장흥읍 평화리(平化里) 입구에 노자가 가장 좋아하는 글인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비가 세워졌다. ‘平和’가 아닌 ‘平化’란 말이 도교적인 말이며, 평화리 내에 고영완선생의 고택 무계원(霧溪園)이 있는데 아름다운 정원이다. 담양의 소쇄원, 구례 운조루, 해남 녹우당, 진도의 운림산방과 비슷하다. 또한 장흥읍에서 무계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소고당 고단여사의 ‘친정길’로도 유명하다.
 
이곳에 상선약수샘이 있어 물과 울창한 숲을 테마로 다양한 놀이 체험과 호젓한 숲 체험을 즐길 수 있는 농촌 전통 테마마을이다. 너른 들판을 따라 운치 있는 메타세쿼이아 길을 지나면 입구에 이른다. 우뚝 솟은 억불산의 연대봉 아래로 마을의 풍경이 평화롭게 펼쳐진다.


이 마을은 다양한 체험과 함께 볼거리가 많은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서 가까운 고영완 고택은 신비로움이 가득하다. 원시림처럼 짙푸른 녹음 속에 고택의 담장과 대문채가 이어진다. 대문채 앞 두 그루의 느티나무는 듬직한 수문장처럼 우뚝 솟아 있는데 나무와 뿌리가 엉켜 있는 연리지다.


배롱나무 군락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송백정은 상선약수마을에서 최고의 절경을 자랑한다. 1934년 연못을 확장하면서 심은 배롱나무 50여 그루가 그림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특히 배롱나무가 만개하는 8월이면 분홍빛 머금은 연못 주변은 아름다운 황홀경이다.

 

강원구 호남문화관광연구원장


 

 

 

 

 

 

桓因桓雄檀君天帝 太三聖祖崇敎 國宗院

환인환웅단군천제 태삼성조숭교 국종원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