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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 정헌공진사공파 중시조 선재 김극의선생의 생애

백운선사 김대현 2017. 6. 8. 14:53

 

 

 

 

 

進士公 仙齋 金克義先生의 生涯

 

 

曺喜龍

 

淸廉 剛直한 선비로서 後學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進士公 仙齋 金克義(1459~1517)先生은

 

朝鮮 初期의 儒賢이시며 先生의 자는 道中이고 號는 仙齋으로 본관은 安東이다.

 

 

祖는 比安縣監 三近이고 父는 寶白堂 金係行(1431~1521)은 1447년 진사가 되고 成均館에 입학하여

 

金種直과 교유하며 學文을 익혔다.

 

 

 

그 뒤 성주. 충주의 향학 교수를 지냈고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합격하고

 

宗簿司主簿에 제수되어 직언을 잘 하였다.

 

이어서 고령현감이 되어 선정을 펴고 내직으로 옮겨 弘文館부수찬이 되었으며,

 

그뒤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간쟁 업무에 힘썼다.

 

 

 

1498년(연산군 4)대사간에 올라 權奸을 극론하였으나 훈구파에 의해 제지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하였다.

 

 

 

풍산사제 위에 조그만 정자를 지어 보백당 이라 하고 학생을 모아 가르치니 보백선생이라 불리었다.

 

 

 

김종직 등과 교유한 것으로 말미암아 무오사화. 감자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다행히 큰 화는 면했다.

 

 

 

1706년(숙종 32) 지방 유생들이 그의 덕망을 추모하여 안동에 묵계서원을 짓고 향사하였다.

 

1859년(철종 10)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定獻이다.

 

 

진사공 종식 김극의선생은 대사성 보백당선생의 자제 오형제중 차남으로,

 

모는 증 정부인 의령남씨로 지평 상치의 딸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며 학문을 부지런히 하여 진사과에 합격하고

 

문장학행으로 후진을 敎導하는 등 世間에 名聲을 떨쳤고 文科에는 應試하지 않았다.

 

 

天性이 淸廉潔白하고 剛毅剛直하여 外物에는 추호도 動搖되는 일이 없는 분이었다.

 

이때 정쟁으로 執權 간소배들의 소행이 사화를 일으킴에 부 보백당선생의 獄苦와

 

연산군의 暴政에 困難을 겪으면서 보백당선생의 辭職으로 草野로 家率을 데리고 移徙하여

 

學文을 探究하며 가난하나 草野에서 歲月을 보내며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士夫(男子의 美稱)가 成均 進士만은 아니 할 수 없으나 大科(文武科)에는 참여치 말라"고 말씀 하셨다.

 

선생은 보백당선생의 육훈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정신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시다.

 

 

아쉽게도 부 보백당선생보다 먼저 세상을 뜨셨다.

 

死後 地方 儒生들이 그의 德望을 追慕하여 和不遷으로 지정 봉제를 지내오던 중

 

조선말기 당파의 혼란과 폭정에 의해 宗宅과 정자와 齋室등 모든 遺物이 소실되고

 

그 후 1959년 안동 길안 대곡 검단에 선생을 추모하는 영모정을 세우고

 

지금 후손에게는 전하는 口傳으로 胄孫이 忌日을 맞이하여 不遷位를 봉사하고 있다.

 

忌日은 7월 6일이다.

 

 

先生의 淸廉潔白하고 志操를 중시하며 어떤 처지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늘 학문을 가까이 하는 선비정신을 음미하며 글을 맺는다.

 

 

 

 

 

참고문헌-成宗實錄, 燕山君日記,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經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