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발무유족 發無遺鏃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0. 17. 10:15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발무유족 發無遺鏃

쏠 발없을 무끼칠 유살촉 족

 

쏠 때마다 화살이 빗나간 것이 하나도 없다

 

이 성어는 조선시대 문신 상촌 신흠(象村 申欽1566~1628)선생의 시문집인 상촌고(象村稿)권사십일(卷四十一) 내고제이(內稿第二) 잡저 이(雜著 二)에 용병편(用兵篇)에서 발췌하다

 

我國嘗南創倭矣 아국상남창왜의

倭支一劍而驅千里之地 如無人也 왜지일검이구천리지지 여무인야

遇於野 則不敢戰而北 우어야 즉불감전이배

遇於城 則不敢守而散 우어성 즉불감수이산

非無兵也 不習於用也 비무병야 불습어용야

今又西阨虜矣 금우서액로의

一出師而全軍覆 兩帥降 일출사이전군복 량수강

甚矣 其不習猶昔也 심의 기불습유석야

以不習之兵 介於倭與虜之間 이불습지병 개어왜여로지간

民安得不困 國安得不危 민안득불곤 국안득불위

我國之兵多兩南西北之賦 아국지병다량남서북지부

兩南乃百濟新羅之遺也 량남내백제신라지유야

嶺之俗 質木而沈 力作而饒業 령지속 질목이침 력작이요업

敎之則足以爲向上之卒 교지즉족이위향상지졸

湖之俗 敏疾而輕 善僞而多變 호지속 민질이경 선위이다변

敎之則足以爲應用之卒 교지즉족이위응용지졸

西北之地 與戎接 卽高句渤海之墟也 서북지지 여융접 즉고구발해지허야

古號健鬪 乘不介之馬 徒裼而馳 고호건투 승불개지마 도석이치

奮臂以號 木弧楛矢 發無遺鏃 분비이호 목호고시 발무유족

敎之則足以爲莫當之卒 교지즉족이위막당지졸

故百濟敎之以強其國 고백제교지이강기국

高句敎之以抗中夏 고구교지이항중하

新羅敎之以統三韓 신라교지이통삼한

兵無常形 習之則強 병무상형 습지즉강

苟無習之 不易世而同矣 구무습지 불역세이동의

 

우리나라는 일찍이 남쪽의 왜적에게 침해를 당해 혼이 났다

왜적이 한 칼을 지니고 천 리의 땅을 밀고 쳐들어오기를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였다

들판에서 만나면 감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배하고

성에서 만나도 감히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고 흩어졌는데

군사가 없어서가 아니라 훈련을 하지 않은 군사를 썼기 때문이다

이제 또 서쪽의 오랑캐에게 침략을 당하였다

한 번 군사를 출동했다가 전 군사가 패하고 두 장수가 항복하였다

지나칠 정도로 옛날처럼 훈련을 하지 않았다

훈련하지 않은 군사로써 왜적과 오랑캐의 사이에 끼여 있으니

백성이 어떻게 곤궁하지 아니할 수 있으며 나라가 위태롭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군사는 양남과 서북에서 많이 징발하였는데

양남은 이에 백제와 신라의 유민이다

영남의 풍속은 질박하며 침착하고 노력하여 풍요하게 살므로

잘 가르치면 족히 윗사람에게 순응하는 군졸이 될 것이고

호남의 풍속은 민첩하고 날쌔며 잘 속이고 기변이 많으므로

잘 가르치면 넉넉히 응용할 수 있는 군사가 될 것이며

서북의 지역은 오랑캐와 함께 접하는데 즉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이다

예로부터 잘 싸운다고 이름이 났으며 갑옷을 입히지 않은 말을 타고 맨몸으로 달리면서

팔을 흔들고 소리치며 나무 활에 싸리화살을 쏠 때마다 빗나간 적이 없으며

이렇게 가르치면 족히 당할 자 없는 막강한 군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가 가르쳐서 그 나라가 강하였으며

고구려가 가르쳐서 중하와 겨루고 막았으며

신라가 가르쳐서 삼한을 통일하였다

군사는 항상 일정한 형태가 없어서 훈련을 시키면 강해지고

진실로 훈련을 시키지 않으면 어느 세상 할 것 없이 같을 것이다

 

이 성어는 조선시대 초중기의 문신인 문정(文貞)공 상촌 신흠(象村 申欽1566~1628)선생의 시문집인 상촌고(象村稿)에 용병편(用兵篇)에서 발췌하였는데 선생은 선조 18(1585)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고 1586년 승사랑으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1583년에 외숙인 송응개(宋應漑)가 이이(李珥)를 비판하는 탄핵문을 보고 이이는 사림의 중망을 받는 인물이니 심하게 비난하는 것은 불가하다라는 질책을 받고 또 이 일로 불이익을 당하였으나 할 말은 하는 선비로서 벼슬하기 전부터 이미 문명을 떨쳤는데 벼슬에 나가서는 서인인 이이와 정철을 옹호하여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선조의 신망을 받으면서 항상 문한직(文翰職)을 겸대하고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문운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사후 효종 2(1651) 인조묘정에 배향되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쏠 때마다 화살이 빗나간 것이 하나도 없다 라는 오늘의 성어 발무유족(發無遺鏃)은 비단 군사 뿐만이겠는가 우리의 인생사도 부단히 훈련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평탄치 못한 것과 같이 나라의 국방을 책임진 군사는 한시라도 게을리 훈련해서는 아니되는 것이기에 더욱 중요하며 붓을 든 문인은 더 많은 훈련을 해야 만이 휘호 할 때마다 작품다운 작품이 발무유족(發無遺鏃)같이 나올 수 있도록 분발하면서 성어문집에 담고 휘호로 남긴다

 

桓紀 921791일 초하루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