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효로최저 効勞最著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0. 15. 11:08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효로최저 効勞最著


형상할 효効 일할 로勞 가장 최最 분명할 저著

일을 한 공로가 가장 뚜렷하다 

이 성어는 조선시대 정조대왕이 동궁 시절부터 국왕 재위기간 동안 지었던 여러 시문(詩文) 윤음(綸音) 교지 및 편저 등을 모아 편집한 홍재전서(弘齋全書) 권삼십사(卷三十四)에 온양 행궁의 괴대에 비석을 세우라는 하교(溫陽行宮槐臺竪碑敎)에서 발췌하다

兵曹以陪從人咸鏡監司趙宗鉉 병조이배종인함경감사조종현 
以洗馬陪從啓 이세마배종계 
敎曰 亦爲加資 念其先重臣陪從之事 교왈 역위가자 념기선중신배종지사 
豈勝愴傷 重臣官敎傳宣日 기승창상 중신관교전선일 
亦爲致祭於故重臣趙雲逵 역위치제어고중신조운규 
而又思之 故重臣之先重臣 이우사지 고중신지선중신 
卽予封冊時師傅也 즉여봉책시사부야  
曾亦記存而今於致祭之時 증역기존이금어치제지시
豈可闕焉 一體爲之 기가궐언 일체위지 
又以隨駕人淸州營將李仁康追啓 우이수가인청주영장리인강추계 
敎曰 其時擧行於溫宮 교왈 기시거행어온궁
而効勞最著 이효로최저 
况其地處異於他人 황기지처이어타인 
特授知中樞 특수지중추

병조가 임금을 모시고 따라간 사람으로는 함경도 감사 조종현이 
세마의 벼슬로서 배종하였다고 아뢰자 
하교하시길 또한 품계를 올려주라 그 중요한 신하의 애비가 배종하였던 일을 생각하면 
어찌 슬픈 마음 가누겠는가 중요한 신하에게 임명사령장을 전하여 선포하는 날 
또한 중신의 애비인 고 조운규 중신에게 치제하라 
또 그것을 생각하건대 고 중신의 아비인 고 중신 조영국
또한 곧 내가 책봉될 때의 사부였다 
이전에 또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제 치제하는 이때에 
어찌 빠뜨릴 수 있겠는가 하나같이 행하라 
또 어가를 수행했던 사람으로 청주의 영장 이인강에 대하여 뒤따라 아뢰자 
하교하길 그 당시에 온양 행궁에서 거행하면서 
힘든 일에 공로가 가장 많았던 사람이다
하물며 그의 처지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니 
특별히 지중추부사에 제수하라 고 하셨다
이 성어는 조선시대 정조대왕이 영조대왕 36 경진년(1760) 7월에 있었던 온양행궁에 치적에 대한 비를 세우면서 공로가 많았던 조종현(趙宗鉉1731~1800) 부 조영국(趙榮國) 조부 이조판서 조운규(趙雲逵)등 3대에 걸쳐 공로에 조종현은 승진사령장과 부와 조부에게는 임금이 직접 제문을 써서 내리고 제사를 지내라는 치제를 하교하는 내용을 발췌하였다

효헌(孝憲)공 천은 조종현(天隱 趙宗鉉1731~1800)선생은 본관은 양주이며 영조 32년(1756) 사마시에 합격하고 176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 교리 사간 승지 등을 거쳐 대사간 대사성 대사헌을 지냈으며 정조 1년(1777) 당쟁에 연루되어 시파(時派)의 탄핵에 의하여 김수현(金壽賢) 최재흥(崔載興) 등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며 1789년 다시 등용되어 동지사의 부사로 정사 이성원(李性源)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 함경도관찰사 병조 형조 공조의 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1797년 예조판서 재직시 영릉(寧陵)의 보수문제와 관련하여 파직당하였으나 바로 한성부판윤에 복직되어 이 때 장적편찬자료(帳籍編纂資料)인 호적단자(戶籍單子)의 소실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대한 책임으로 전 한성판윤 김문순(金文淳)과 함께 포천에 유배되었으며 그 뒤 곧 풀려나와 개성부유수 전라도관찰사 판중추부사 등을 거쳐 순조 즉위년(1800)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선생은 문장 시 서에 뛰어났으며 특히 해서에 능통하였으며 천은난고(天隱亂稿)와 시집 창주한영(滄洲閒咏) 그리고 그의 편저로 알려져 있는 시집 산수영(山水影) 등이 저서로 전하며 선생의 집안은 대대로 뿌리 깊은 국가에 충성하고 벼슬길에 오른 명문가집안이다 [한국민족문화백과 참조]

일을 한 공로가 가장 뚜렷한 오늘의 성어 효로최저(効勞最著)의 공로로 특별히 지중추부사로 승진 제수 받은 주인공 이인강(李仁康)선생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안타깝게도 사적에는 승진과 치적이 여러 번 등장하다가 마지막에 잘못 된 일로 연루되어 자식을 시켜 무녀를 가까이하게 하고 종을 시켜 그 주인을 사지에 빠뜨리게 한 사실을 어느 모로 보나 어찌 집에 있었기 때문에 몰랐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추문 기록이 정조 6년 임인(1782)3월 14일(신축) 이인강 정조6년의 기사에 등장 한 걸로 봐서는 이 일로 인하여 세상의 이름이 지워져 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이 이치에 합당한 일이라면 모든 정성과 지혜와 힘을 동원하여 일을 성공시키게 되면 공로의 표창보다도 본인의 성사시킨 뿌듯함이 더 영광스러운 것이며 표창은 부수적인 것일 게다 자신을 잘 수신하면서 공적이든 사적이든 나아가는 길에 몸을 아끼지 않고 힘든 일을 뚜렷하게 수행하면 그 길에는 치적이 따라 승진과 번창은 필수 일 것이며 이인강선생처럼 승승장구 할 수 있는데 마지막 방심과 욕심이 허투루 빗나가 버리면 이 때까지 쌓아 올렸던 금자탑이 한순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우리의 인생사임에 명심하고 늘 언제나 방심과 욕심을 경계 경계하면서 자신의 행장을 닦아 나아가야 한다고 보며 필자도 또한 그렇게 살아가길 다짐하며 주어진 일에는 어차피 할 바에는 가장 뚜렷하고 분명히 드러나게 하는 효로최저(効勞最著)의 정신으로 임해야 한다고 보며 오늘의 성어로 성어문집에 담고 휘호하여 기록에 남긴다


桓紀 9217년 8월 29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