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제민창이 濟民瘡痍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0. 12. 10:46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제민창이 濟民瘡痍


건넬 제濟 백성 민民 부스럼 창瘡 상처 이痍

백성의 아픈 상처를 고치다

이 성어는 조선초기의 문신 춘정 변계량(春亭 卞季良1369∼1430)선생의 시문집인 춘정선생문집(春亭先生文集)권십일(卷十一)에 진산부원군 하호정 선생에게 드리는 제문(祭晉山府院君河浩亭先生文)에서 발췌하다 

皇矣上帝 眷佑東陲 황의상제 권우동수 
命我聖后 作之君師 명아성후 작지군사 
乃生賢佐 輔之翼之 내생현좌 보지익지 
公惟藥石 濟民瘡痍 공유약석 제민창이 
公惟水鑑 辨人姸媸 공유수감 변인연치 
危疑未決 公乃蓍龜 위의미결 공내시구 
輕重未定 公乃權衡 경중미정 공내권형 
或毀或譽 公心則平 혹훼혹예 공심칙평 
事上待下 一以至誠 사상대하 일이지성 
威如秋凜 溫若春生 위여추름 온약춘생 
高不可攀 深不可測 고불가반 심불가측 
細入毫釐 幾微必燭 세입호리 기미필촉 
泰山其重 鎭定振擊 태산기중 진정진격
滄海其大 茹納汚濁 창해기대 여납오탁 
公自庚辰 秉國之勻 공자경진 병국지균 
垂紳廊廟 百度維新 수신랑묘 백도유신

전지전능 하나님께서 우리 동방청구를 도우시니 
우리의 성군에게 명하여 임금의 스승으로 삼으시고 
이어 어질게도 보좌를 내어 옆에서 돕고 도왔습니다
공은 오직 약돌과 같아서 백성의 아픈 상처를 낫게 하고 
공은 오직 물과 거울 같아서 사람들의 곱고 추한 것들을 가려내고
위태하고 의심스러워 결정을 미룰 때 공은 곧 시귀처럼 맞춰냈고 
가볍고 무거운 경중이 정해지지 않을 때 공은 곧 저울처럼 균형잡고
혹 명예를 헐뜯기도 혹 높이 기리기도 했지만 공의 마음은 평온했으며 
윗사람 모시고 아랫사람 접대하길 한 결 같은 지성이었으며 
위엄스럽기는 추상처럼 늠름하고 온화함은 봄기운이 소생하는 것 같았습니다
높아서 잡고 오를 수 없으며 깊어서 측량할 수 없었지만 
세밀함은 털 하나까지 다루었고 기미를 반드시 밝혔습니다 
태산같이 그 중심잡고 있으니 떨치고 부딪쳐도 진정시키고 
푸른 바다같이 넓고 크니 더럽고 혼탁한 것을 안았으며 
공이 경진년부터 두루두루 나라의 권력을 잡고 
관복을 갖추고 묘정에 나아가니 수많은 제도들이 새로워졌습니다 

이 성어는 고려 말 조선 전기의 문신인 문충(文忠)공 호정 하륜(浩亭 河崙1347~1416)선생의 기일에 문숙(文肅)공 춘정 변계량(春亭 卞季良1369∼1430)선생이 쓴 제문에서 발췌를 하였는데 문숙공 춘정 변계량선생은 발췌문에서처럼 상제하나님을 섬기고 특히 대제학으로 있을 때  가뭄이 심해 상왕이 크게 근심하자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예는 아니나 상황이 절박하니 원단에 빌기를 청하여 태종이 선생에게 제문을 짓게 하고 영의정 유정현을 보내 제사를 드리게 하니 과연 큰비가 내렸는데 이 일로 귀신과 부처를 섬기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하여 유교를 국교로 하는 조선의 유림에서 선생을 살기를 탐내고 죽기를 두려워 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그 당시에 비난을 받았는데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네 살에 옛 고시를 외우고 여섯 살에 글을 지었으며 고려 우왕 8년(1382) 진사시 이듬해 생원시에도 합격하고 1385년 문과에 급제한 후 전교주부 비순위정용랑장겸 진덕박사가 되었으며 1392년 조선 건국과 더불어 천우위중령중랑장 겸 전의감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의학교수관을 거쳐 1396년(태조 4)에는 교서감승에 지제교를 겸하였으며 그 후 성균관학정 사제감소감 겸 예문관응교와 직제학을 역임하고 태종 7년 문과 중시에 을과 제1인으로 뽑혀 당상관에 오르고 예조우참의 이듬해 세자좌보덕 예문관제학 춘추관동지사 겸 내섬시판사 경연동지사 세자우부빈객 수문전제학 좌부빈객 예문관대제학 겸 성균관대사성 우빈객 예조판서 경연지사 춘추관지사 의정부참찬 등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1419년에는 대부분의 관료들이 반대한 왜구 토벌을 강력히 주장하여 이종무를 앞세운 대마도정벌 기해동정(己亥東征)을 성공케 하는 데 공헌하였으며 세종 2년 집현전이 설치된 뒤 대제학이 되고 우군도총제부판사가 되었으며 특히 문장에 뛰어나 거의 20년 간 대제학을 맡아 외교 문서를 작성하였으며 과거 시관으로 지극히 공정을 기해 고려 말의 폐단을 개혁하였는데 앞장섰다

백성들의 아픈 상처를 고치다의 주인공 문충(文忠)공 호정 하륜(浩亭 河崙1347~1416)선생도 많은 일을 하였는데 위 제문에처럼 자신을 아끼지 않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한 것은 참으로 잘 한 것이라 믿으며 제민창이(濟民瘡痍)을 오늘의 성어로 정한 것은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19 바이러스 전염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국민을 잘 이끌어가는 정부와 잘 따르는 다수의 국민들을 보며 그래도 이 나라는 희망이 있는 나라구나라고 믿으며 오로지 위정자들에게만 제민창이(濟民瘡痍)를 바랄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이 스스로 서로서로 제민창이(濟民瘡痍)정신으로 이 위기극복을 차분하게 대처해 나간다면 반드시 좋은 날이 다시 오리라 확신하며 제민창이(濟民瘡痍)를 휘호하고 백운필담에 담는다


桓紀 9217년 8월 26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