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일서풍휘 日舒風揮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0. 9. 10:26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일서풍휘 日舒風揮

날 일펼 서바람 풍휘두를 휘

 

햇빛이 쏟아지고 바람이 불다

 

이 성어는 조선중기 문신인 택당 이식(澤堂 李植 15841647) 선생의 시문집인 택당선생별집(澤堂先生別集) 권일(卷一)에 병술년에 회맹제를 거행하고 나서 중외에 사전을 반포한 교서(丙戌會盟祭後頒赦中外敎書)에서 발췌하다

 

日舒風揮 氛祲大滌 일서풍휘 분침대척

雷轟電震 魑魅莫逃 뢰굉전진 리매막도

渠魁快殲 群黨盡磔 거괴쾌섬 군당진책

無亡矢遺鏃之費 무망시유족지비

鯨鯢就京觀之封 경예취경관지봉

轉一髮千斤之危 전일발천근지위

宗社有盤石之固 종사유반석지고

苟非忠貞之效力 구비충정지효력

曷膺封爵之疏榮 갈응봉작지소영

繼有萑苻之徒 實潛蜂蠆之毒 계유추부지도 실잠봉채지독

綠林靑谿之聚 豈惟攻剽州閭 록림청계지취 기유공표주려

狐叢魚腹之妖 敢欲侵軼京甸 호총어복지요 감욕침질경전

以國家威信之已著 伊碪斧誅討之不留 이국가위신지이저 이침부주토지불류

雖發告初止於一人 수발고초지어일인

然功令允合於三等 연공령윤합어삼등

 

햇빛은 쏟아지고 바람이 불어 요망스런 기운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번개가 치고 천둥 벼락소리 울리는데 도깨비들이 도망가지 못하고

우두머리를 통쾌하게 섬멸하고 패거리무리들을 모두 사형되었다

화살이나 화살촉을 헛되이 허비하지 않고

악한 자들을 죽여 시체를 쌓아 큰 무덤(경관)을 만들어 무공을 과시하고

머리털 하나에 천여 근의 무거운 무게가 매달려 있듯 하던 위기를 전환시켜

종묘사직을 반석처럼 굳건하게 할 수 있었다

진실로 충성과 곧은 절개로 힘쓴 공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봉작의 영예를 받을 수 있겠는가

이어 강도의 무리가 일어났었는데 실로 벌과 전갈처럼 독을 품고 있었는데

청계산 계곡에 무리소굴을 둔 화적 떼 녹림이 어찌 한 지방의 마을만 약탈하겠는가

호총어복(거짓 현혹)의 요망한 꾀를 내어 감히 경전(나라가 경영하는 밭)을 침략하려 하였으니

이미 국가의 엄격한 힘을 발휘하여 그들을 습격해서 하나도 남김없이 토벌하여 죽여 없앴다

비록 처음에 고발한 것이 한 사람에 그쳤으나

그러나 나라의 법령상 3등으로 봉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다

 

이 성어는 조선조에 화적떼가 극성을 부리 던 무렵의 화적떼 소탕에 혁혁한 공을 세운 공신들에게 왕이 내린 교서의 내용 중에 일부를 발췌하여 소개하는데 이 교서는 조선중기 문신인 문정(文靖)공 택당 이식(澤堂 李植 15841647) 선생의 시문집인 택당집(澤堂集)에 있는 내용이다

 

한문(漢文)4대가 중 한명인 택당 이식선생은 이안눌(李安訥) 정철(鄭澈)의 문인이며 광해군 2(1610) 식년 생원시 3등으로 같은 해 별시 문과 병과에 4위로 급제한 후 광해군 5년 시강원 설서에 임명되었으나 처남인 심정세(沈挺世)가 그의 장인 김제남(金悌男)의 옥사에 연루되자 사퇴하였으며 광해군 8년 북평사가 되고 이듬해 선전관이 되었지만 광해군 10년에 폐모론이 일어나자 은퇴하여 양평 양동에 낙향하여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고 이후 광해군이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하였지만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광해군 15(1623) 인조반정 이후 본격적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대사간 대제학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광해군일기 편찬과 선조수정실록 개수를 주관하였으며 인조 14(1636) 병자호란 당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피신하고 인조 20년 김상헌(金尙憲)에 동조하였다는 이유로 봉성(鳳城)으로 끌려갔다가 의주로 가서 구금되었지만 곧 풀려났으며 인조 24년에 예조판서로 문과 별시의 시험관이 되어 출제하였는데 시제(詩題)에 역의(逆意)가 있다고 모함하여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이듬해 택풍당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저서로 초학자훈증집(初學字訓增輯) 두시비해(杜詩批解) 수성지(水城志) 야사초본(野史初本)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 송시열이 1674(현종 15) 편찬하고 간행한 택당집(澤堂集)이 전하며 효종 즉위년(1650) 삭탈당한 관직이 복구되고 숙종 12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여주의 기천서원에 배향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참조]

 

조선 중기는 왜란이 일어난 이후에 어지러운 세상사에 먹을거리가 없으니 자연 화적떼가 극성을 부렸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 피해를 직접당한 필자 집안의 선조 어르신들은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을까 그 일로 집이 불타고 임하에서 석보지경으로 이주한 계기가 되었으며 그때 간신히 가지고나온 불에 타다만 서책들이 어릴 때 집안에 그렇게 많았었는데 세월이 흐르고 고서적을 구입하는 분들이 혼자 집안을 지키는 연로한 할아버지에게 접근하여 감언이설로 좋은 책 잠시 빌려보고 싶다며 담뱃값 선물하고는 그 후 감감무소식인 사람들 그때에 없어 진 책이 족히 100여권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훈민정음 상주본이라고 불에 탄 흔적이 있는 사진을 보니 마치 어릴 적 집안에 있었던 그 책들이 떠오르는데 마침 오늘 성어를 풀이하면서 화적떼 소탕에 대한 이야기와 연관이 되니 감회가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햇빛이 쏟아지고 바람이 불다라는 평범한 이야기 같으면서도 깊이 생각하면 나쁜 짓을 범하면 결국 하늘로부터 벌을 받기 마련이며 그 벌은 강하게 햇볕으로 말려 버릴 정도로 바람에 쓸어 버리는 대 청소와 같은 일서풍휘(日舒風揮)를 고이 성어문집에 담고 휘호를 한다

 

 

桓紀 9217823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