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도절름록 徒竊廩祿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0. 6. 11:22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도절름록 徒竊廩祿

무리 도훔칠 절곳집 름복 록祿

 

무리들이 나라의 곳간과 녹봉을 몰래 훔치다 그저 나라의 녹봉만 축내고 있다라는 의미이다

 

이 성어는 조선 인조 때의 문신 학자인 문정공(文正公)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1652)선생의 시문집인 청음선생집(淸陰先生集) 권십칠(卷十七)에 시폐에 대하여 논한 상소(論時弊疏)에서 발췌하다

 

臣竊自念 신절자념

萬物群生 各賦性靈 만물군생 각부성령

蟲蛇感恩 尙思報德 충사감은 상사보덕

以臣事主 其義曷極 이신사주 기의갈극

糜身粉骨 猶且不憚 미신분골 유차불탄

罄忱殫誠 其何敢緩 경침탄성 기하감완

顧臣才稟 匪剛匪精 고신재품 비강비정

少壯悠悠 忽至暮齡 소장유유 홀지모령

今欲 效勞邊疆 則材力難強 금욕 효로변강 즉재력난강

分憂字牧 則聰明全喪 분우자목 즉총명전상

從事鉛槧 則盡抛舊業 종사연참 즉진포구업

犯顏諫諍 則素乏鯁直 범안간쟁 즉소핍경직

蔑補涓埃 徒竊廩祿 멸보연애 도절름록

臣言肝鬲 一毫無飾 신언간격 일호무식

 

신이 몰래 생각하여 보니

생명이 있는 모든 만물은 각기 성령을 천성적으로 타고나며

벌레나 뱀들도 은혜에 감사하고 오히려 덕을 갚으려고 생각합니다

이러하니 신하로서 주인을 섬기는데 의리가 어찌 다함이 있습니까

몸이 문드러지고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오히려 장차 꺼리지 않아야 하는데

성심을 다해 정성을 다하는 것을 어찌 감히 느슨히 할 수 있습니까

돌아보니 신은 타고난 자질이 강하지도 아니하고 정밀하지도 아니하여

젊은 시절을 그냥 소일하다보니 홀연히 황혼의 나이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변방에서 영향력 있는 공로를 세워보고 싶어도 재주와 힘을 강하게 하기 힘들고

목민관으로서 근심을 나누어 가지려해도 총명함을 모두 잃었으니

연참 문필에 종사하려 해도 지난날의 학업마저 모두 잊어지고 없으며

임금 앞에서 직접 간쟁을 하려 해도 원래 곧은 면이 모자랍니다

이에 아주 작은 티끌만큼도 도움 되지 못하고 그저 녹봉만 축내고 있습니다

신의 이 말은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서 터럭만큼도 꾸민 것이 아닙니다

 

이 성어는 문정(文正)공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1652)선생의 시문집인 청음선생집(淸陰先生集) 권십칠(卷十七)에 시류의 폐단에 대하여 논한 상소(論時弊疏)문에서 발췌하였는데 청음선생은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아우이며 선조23(1590)년 진사가 되고 1596년 전쟁 중에 실시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권지승문원부정자 부수찬 좌랑 부교리를 거쳐 16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을 다스리기 위한 안무어사로 파견된 후 고산찰방 경성도호부판관을 지낸 후 광해군 즉위년(1608)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 한 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교리 응교 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 배척에 앞장선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했다가 광주부사로 좌천되었으며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공신 세력의 보합위주정치(保合爲主政治)에 반대하고 시비(是非)와 선악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해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어 대사간 이조참의 도승지 부제학을 거쳐 인조4(1626)년 성절 겸 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로 명나라에 갔다 온 후 육조의 판서 및 예문관 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내다가 1632년 왕의 생부를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려는 데 반대해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1635년 대사헌으로 다시 재기용되자 군비의 확보와 북방 군사 시설의 확충을 주장하고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 낙향하여 지내면서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나 귀국하고 1645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후에 기로사에 들어갔다

 

효종이 즉위해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으며 김육(金堉)이 추진하던 대동법에는 반대하고 김집(金集) 등 서인계 산림(山林)의 등용을 권고하였으며 1653년 영의정에 추증되고 1661(현종 2)효종 묘정에 배향되고 양주 석실서원 정주봉명서원 개성숭양서원 제주귤림서원 정평망덕서원 함흥창덕서원 경성경산서원 의주기충사 광주현절사 상주 서산서원 종성화곡서원 안동서간사 예안운계사 정평모현사에 제향되었으며 시문과 조천록(朝天錄) 남사록(南槎錄) 청평록(淸平錄) 설교집(雪窖集) 남한기략(南漢紀略) 등으로 구성된 청음전집(淸陰全集)40권이 전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무리들이 나라의 곳간과 녹봉을 몰래 훔치다 그저 나라의 녹봉만 축내고 있다라는 오늘의 성어 도절름록(徒竊廩祿)의 발췌문과 청음선생의 간략한 생애를 살펴보면서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처신을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인가를 곰곰이 뒤돌아보게 하는 좋은 말씀에 고개를 숙이며 사회에 천덕꾸러기가 아닌 당당한 일원으로 할 일을 하는 사람으로 남기 위해 도절름록(徒竊廩祿)을 가슴에 새기며 휘호하고 백운필담에 담아놓는다

 

 

桓紀 9217820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