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강의독실 剛毅篤實

백운선사 김대현 2020. 9. 28. 09:05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강의독실 剛毅篤實

굳셀 강굳셀 의도타울 독열매 실

 

의지가 굴함이 없고 성실하고 믿음이 두텁다

 

이 성어는 조선중기 문신 용주 조경(龍洲 趙絅1586-1669)선생의 시문집인 용주선생유고(龍洲先生遺稿)권이십(卷二十)에 증 좌참찬 연안군 이공 신도비명 병서(贈左參贊延安君李公神道碑銘幷序)에서 발췌하다

 

公爲人剛毅篤實 而辦於文 공위인강의독실 이판어문

自少有大節 자소유대절

不肯隨人後碌碌乾沒 불긍수인후록록건몰

故進塗屢躓 而及乎危難之日 고진도루지 이급호위난지일

則西門之管 不得不推公矣 즉서문지관 부득불추공의

然以今揆之 연이금규지

當時秉國匀者 不識才公之爲則已 당시병국균자 불식재공지위즉이

如識之 胡束公於餫餉 여식지 호속공어운향

而受制棄師之元帥 이수제기사지원수

使公終不得罄其囊底之知乎 사공종부득경기낭저지지호

公之下駟猶足以起兩西之瘡痍 공지하사유족이기량서지창이

況其上者乎 古人有言曰 황기상자호 고인유언왈

古今有一大事 고금유일대사

必生一人荷擔 필생일인하담

 

공은 사람됨이 의지가 굴함이 없고 성실하고 믿음이 두텁고 문장력도 갖추었다

어릴 때부터 큰 절개가 있어서

사람들의 뒤를 따라 일반 민간인들의 재산을 빼앗는 것은 옳지 않았기에

벼슬길에 나아가는데 곤란이 있었으나 위태롭고 어려운 때에 이르러서는

즉 서문을 관장하는 사람으로 공을 추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헤아려 보니

당시에 나라의 권력을 두루 잡은 자가 공의 재능을 몰랐으니 그쳤겠지만

그것을 알았다면 어찌 공을 군량을 수송하는 일에 묶어두어

군사를 버린 원수에게 통제를 받도록 하여

공으로 하여금 끝내 주머니 속의 지혜로운 계책을 허무하게 얻지를 못하였겠는가

공이 조금만 재능을 부려도 오히려 충분히 양서지방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는데

하물며 그것이 큰 것인가 옛사람이 한 말에 이르기를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의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한 사람이 책임을 짊어지게 된다

 

이 성어는 조선중기 문신인 문간(文簡)공 용주 조경(龍洲 趙絅1586-1669)선생이 찬한 증 좌참찬 연안군 이공 신도비명 병서(贈左參贊延安君李公神道碑銘 幷序)에서 발췌하였는데 용주 조경선생은 광해군 4년에 사마시 합격 후 대과를 보지 않고 거창에 은거하다가 인조1(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고 형조좌랑 목천현감을 지내면서 인조4년 문과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정언 교리 등의 청직요직을 거친 후에 국가의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 재능 있는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인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던 중에 인조 5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였을 때 지평으로 강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논박하였으며 인조 21년에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기행문 일본 기행을 저술하였으며 용주집(龍洲集) 동사록(東槎錄)등 저서가 있으며 또 여러 편의 묘갈문과 신도비문을 지었는데 선생의 문장력이 대단함은 남긴 묘갈명 문장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고 포천의 용연서원 흥해의 곡강서원 춘천의 문암서원에 각각 제향 되신 유명한 선생이시다

 

용주선생이 찬한 신도비의 충정(忠定)공 탄옹 이현(灘翁 李?1584~1637)선생은 연안(延安)이씨로 부는 판서 이광정(李光庭) 모는 심순(沈筍)의 딸이며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의 사위이다

선조 36(1603)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사과가 되었으며 광해군 2년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벼슬길에 들어섰으나 장인인 유영경이 대북파에 의해 추죄(追罪) 될 때 삭직되어 10여 년간 파산 금양 노량 등지에서 우거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성균관전적으로 다시 서용되고 이어 호조 병조 형조의 좌랑을 지냈으며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아버지 광정과 함께 천안으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고 인조를 호가해 서울로 돌아온 뒤 예조정랑에 오르고 곧 영평현감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으며 직강 태복첨정 예빈시정 정언 장령 문학 정언 순천부사 가자 공청도양전사가 되었으며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636년 양서관향사로 공을 세워 이듬해 가선대부에 오르고 연안군에 봉해지고 곧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의주 백마산성에서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 또한 글씨로 당대에 이름이 높아 1630년 목릉지(穆陵誌)를 썼고 2년 후에는 국장도감 서사관을 지내기도 하였으며 자헌대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한국민족대백과 참조]

 

의지가 굴함이 없고 성실하고 믿음이 두텁다라는 오늘의 성어 강의독실(剛毅篤實)은 늘 가지고 싶어 하는 생활신조 중에 하나인데 위의 두 분 선생의 두터운 의지와 신실한 믿음이 굳건하였음을 대략적으로 정리한 행장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의 선현들이 남긴 유집들에 성어를 발췌하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의 선현들은 학문과 문학 서화 예술 다방면에서 대단한 경지의 업적을 남기셨으며 그 저변에는 지극히 서로 존중하고 인간을 지극히 자기 자신이 아닌 남을 먼저 배려하는 홍익정신이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다 이는 삼성신의 후손이기 때문이기에 그렇다 라고 필자 스스로 정리를 하며 굴하지 않는 의지에 도타운 믿음인 강의독실(剛毅篤實)을 오늘의 성어로 휘호하고 백운필담에 담는다

 

 

桓紀 9217812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