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력양운로 歷敭雲路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0. 19. 10:17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력양운로 歷敭雲路


지낼 력歷 오를 양敭 구름 운雲 길 로路 

두루 구름길에 드날리다 즉 두루 벼슬길에 드날리다라는 의미이다

이 성어는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성리학자인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1337~1398)선생의 시문집삼봉집(三峯集)에 후서 신숙주(後序 申叔舟)에서 발췌하다

鄭君早捷科第 歷敭雲路 정군조첩과제 력양운로
今自諫議出按慶尙 금자간의출안경상
諫議卑階 慶尙大道 간의비계 경상대도 
君尙鬢靑而腰金攬轡 군상빈청이요금람비 
榮亦至矣 영역지의 
豈非先生之餘慶將享于君耶 기비선생지여경장향우군야 
天道施獲之理可驗 천도시획지리가험 
而國家報勳之意於是可見矣 이국가보훈지의어시가견의 
然所謂繼業蓋愆者 將止是而已乎 연소위계업개건자 장지시이이호 
君益勉之 군익면지
先生諱道傳 字宗之 선생휘도전 자종지 
君諱文炯 字野叟 군휘문형 자야수 
成化元年乙酉孟秋有日 성화원년을유맹추유일 
輸忠協策靖難同德佐翼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 
수충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령의정부사 
領藝文 春秋館事 世子師高靈府院君申叔舟 謹序 
령예문 춘추관사 세자사 고령부원군신숙주 근서

정군(문형)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두루 벼슬길에서 이름을 빛냈으며
지금은 간의의 직으로 경상도 안렴사로 나갔는데 
간의는 낮은 계급이지만 경상은 큰 도이다 
그대는 아직 귀밑털이 청청한데 허리에 금 혁대를 띠고 관리의 길 고삐를 쥐었으니 
영화롭고 또 역시 지극하다 할 수 있겠다
어찌 선생이 남긴 경사를 장차 군으로 하여금 누리게 함이 아니겠는가 
하늘의 도는 베푼 자에게 돌아간다는 이치를 가히 증험하는 것이니 
국가의 공로에 대한 보답의 의의도 여기에서 가히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소위 조상의 업을 계승하고 선대의 허물을 덮는 것이 장차 여기에 그칠 뿐이겠는가
군은 더욱 더 힘써야 한다
선생의 휘는 도전이요 자는 종지이고
군의 이름은 문형이고 자는 야수이다
성화 원년 을유 7월 가을 어느 날
수충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영예문춘추관사 세자사고령부원군 신숙주는 삼가 씀

이 성어는 조선 세조 때의 문신 희현당 신숙주(希賢堂 申叔舟1417~1475)선생이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1337~1398)선생의 시문집인 삼봉집(三峯集)을 삼봉선생의 증손 야수 정문형(野叟 鄭文炯 1427~1501)선생이 삼봉선생의 시문(詩文) 잡저(雜著)를 찬집(撰集)하여 장차 판각에 붙일 양으로 서간을 보내어 희현당선생에게 서문을 부탁하여 쓴 서문에서 발췌를 하였는데 희현당 신숙주선생은 본관이 고령으로 자는 범옹(泛翁)이며 호는 보한재(保閑齋) 희현당이며 영의정을 지냈으며 훈민정음의 창제와 보급에 공을 세웠고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저서로는 문집인 보한재집(保閑齋集)과 북정록(北征錄) 사성통고(四聲通攷) 등이 있으며 세종대왕이 명나라의 문장가 예겸(倪謙)이 조선에 사신으로 오자 신숙주와 성삼문을 보내 글을 겨루게 하였는데 예겸은 신숙주 앞에서 오금을 펴지 못하고 돌아가 신숙주를 의 유명한 초(楚)나라의 정치가(政治家)이자 문인인 굴원(屈原)에 비겨 칭찬해 마지않았다고 하며 세종대왕은 이렇듯 신숙주를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그 뒤 세종대왕은 희현당선생의 나이 불과 33세에 집현전 학사의 우두머리인 직제학으로 삼았으며 세종대왕이 신숙주는 장차 큰일을 맡길 만한 자이다 라고 말한 것이 실록에도 기록되어 전하며 그러나 희현당 신숙주선생은 미처 큰일을 다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 버렸다[다음백과참조]

삼봉 정도전선생의 증손 양경(良敬)공 야수 정문형(野叟 鄭文炯 1427~1501)선생은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명숙(明叔) 세종 29년(1447) 별시문과에 희현당 신숙주선생과 같이 급제하고 세조 1년(1455) 교리로 좌익원종공신 2등이 되고 사간을 거쳐 1460년 예조좌랑으로 가례색도감낭청을 겸직하였으며 1464년 공조참의를 거쳐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1466년 함길도절도사 변정원판결사를 거쳐 성종 23년(1492) 우찬성이 되었으며 1495년 판중추부사 우의정이 되어 궤장(櫃杖)을 하사받았으나 탄핵을 받고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으며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사림들이 당시 훈척계열(勳戚系列)의 비리와 비도(非道)를 비판하고 나서자 조정대신 유자광(柳子光) 한치례(韓致禮) 이극돈(李克墩)과 함께 자신들의 방호를 위해 점필제 김종직(金宗直)선생이 생전에 써둔 조의제문을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수록한 조의제문 내용을 문제시하여 대역죄인으로 논단하고 부관참시 할 것을 주장하여 그 결과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고 점필제선생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두루 구름길에 드날리다 즉 두루 벼슬길에 이름이 드날리다라는 의미인 오늘의 성어 력양운로(歷敭雲路)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옛날이든 지금이든 공무원과 또 사회에서 자기의 이름이 휘황찬란하게 드날리는 걸 싫어 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리라 믿으면서도 그 이름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휘 날린다면 영원토록 칭찬받아 마땅하고 우러러 볼 것이지만 남에게 피해를 준 휘날림이라면 그 이름 마땅히 칭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 피해를 입은 후손이  그 조상의 내력을 알고 피해를 안다면 피해를 준 그 분의 이름 앞에 경의를 표할 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력양운로(歷敭雲路)의 성어 자체에는 문제가 없고 좋은 말이기에 마땅히 성어문집에 담고 휘호로 기록에 남긴다

桓紀 9217년 9월 3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