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소게만고 昭揭萬古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0. 21. 10:47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소게만고 昭揭萬古


밝을 소昭 들 게揭 일만 만萬 옛 고古

오랜 세월동안 밝게 드러나다

이 성어는 조선 중기의 문신 어우당 유몽인(於于堂 柳夢寅 1559~1623)선생의 시문집 어우집(於于集)에 신간 어우당유집발문 유금(新刊於于堂遺集跋 柳琹)에서 발췌하다

嗚呼 嗣已絶 歲又久 오호 사이절 세우구
遺集八十餘冊 散逸殆盡 유집팔십여책 산일태진
余以旁裔 尤庸感慨 여이방예 우용감개 
積歲年蒐錄於斷爛 玆成若干編 적세년수록어단란 자성약간편 
盖存者不能十之一 然謀付剞劂氏 개존자불능십지일 연모부기궐씨 
廣其本 傳之其人 광기본 전지기인 
以述先生遺志之萬一 이술선생유지지만일 
嗚呼 我先朝日月之明 오호 아선조일월지명 
改照於泉塗 雪其寃褒其忠 개조어천도 설기원포기충 
又爲興感於其詩文 우위흥감어기시문
比之以離騷 許之以夷齊 비지이리소 허지이이제 
前後判付文字 昭揭萬古 전후판부문자 소게만고 
嗚呼 先生不昧之靈 必感泣於冥冥오호 선생불매지령 필감읍어명명 
亦將永有辭於天下後世之節義文章 역장영유사어천하후세지절의문장 
先生沒後二百有十年壬辰秋 선생몰후이백유십년임진추 
七世旁孫琹拜手謹跋 칠세방손금배수근발 

오호라 직계 후사가 이미 끊어지고 세월이 흐르고 또 오래이니 
선생의 유집 80여 권이 흩어지고 소실되고 거의 다 없어졌다 
나는 선생의 방손 후예로서 더욱 이에 감개하여 씀으로
이리저리 흩어진 기록들을 오랜 세월 동안 수집하여 이에 약간의 편을 이뤘다
보존된 기록이 10분의 1도 아니 되지만 그러나 이를 판각자에게 부탁해서 간행을 꾀하여
이것을 널리 뿌려서 그 사람들에게 전하여서 
선생이 남기신 뜻의 만분의 일이나마 글로 남기고자 한다
오호라  지난 임금 정조(正祖)의 해와 달처럼 밝고 밝은 빛이 
다시 황천을 비추어 선생의 원통함을 희게 하고 선생의 충절을 기리시어
또 선생의 시문에 감흥을 일으키게 하여 
이소에 견주시고 백이숙제와 같은 절의를 가졌음을 허락하시어 
앞뒤로 임금이 허락하여 말한 문장이 오랜 세월 동안에 밝게 드러나나니
오호라 선생의 어둡지 않은 영혼이 필시 먼 저승에서 감읍할 것이니
또한 영원히 장차 절의와 문장이 천하 후세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으리라
선생이 돌아가신 지 210년 된 임진(순조53년 1832) 가을에 
7대 방손 유금은 절하며 삼가 발문을 쓰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중기의 문신 어우당 유몽인(於于堂 柳夢寅 1559~1623)선생의 시문집 어우집(於于集)에 신간 어우당유집발문(新刊於于堂遺集跋)인데 이 발문은 어우당선생의 7세 방손 류금(柳琹)이 발문을 쓰고 어우당집 동류문(東柳文)은 8세 방손 류영무(柳塋戊)와 함께 유고를 수집 편차하여 중간한 시문집이다

발문을 쓴 류금과 류영무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 없고 류금의 아버지 만화제 류진한(晩華齊 柳振漢1711-1791)선생은 조선시대 영조 30년(1754)에 자신의 호 만화제(晩華齊)를 딴 문집인만화집(晩華集)을 썼는데 여기에는 한문시(漢文詩) 200구(二百句)로 기록된 춘향가의 사설(辭說 판소리의 가사)이 실려 있어 이것을 만화본(晩華本) 춘향가라고 전하는데 그의 아들 류금이 쓴 글에 의하면 만화제선생은 1753년부터 1754년까지 호남지방의 문물을 구경하고 돌아와서 이때 들었던 춘향가의 가사를 한시(漢詩)로 옮겨 실었다고 하는데 만화본 춘향가의 내용은 현재의 춘향가와 거의 같다고 전하며 선생은 지방에서 은거 생활을 하며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으나 선비들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전한다
문장가로 또는 외교가로 이름을 떨치시고 글씨에도 뛰어나셨던 의정(義貞)공 어우당 류몽인(於于堂 柳夢寅 1559~1623)선생은 본관이 고흥이고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 외 간재(艮齋) 묵호자(默好子)이며 1589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했으며 1592년 수찬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평양까지 선조를 모시고 따라갔으며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명나라 관원을 상대하는 외교적인 임무를 맡았으며 병조참의 황해감사 도승지등을 지냈으며 광해군 시절에는 북인에 가담했으나 인목대비 유폐에 찬성하지 않는다 하여 배척되어 그 뒤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서 은거하던 중 대제학에 추천되었으나 거절하고 이로 인해 1623년 인조반정 때 화를 면할 수 있었으나 그해 7월 현령 류응경(柳應㓏)이 광해군의 복위를 꾀한다고 무고하여 국문을 받고 마침내 역률(逆律)로 다스려져 아들 약(瀹)과 함께 사형되었으며 사후 선생의 깨끗한 이름을 기려 전라도 유생들이 문청이라는 사시를 올리고 운곡사(雲谷祠)에 봉양하였으며 신원된 뒤 나라에서 의정(義貞)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운곡사를 공인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저서로는 야담집 어우야담과 시문집인 어우집이 있다[한국민족대백과 참조]

오랜 세월동안 밝게 드러나다 라는 오늘의 성어 소게만고(昭揭萬古)의 발췌문을 읽고 또 발췌문의 저자와 관련된 인물들의 행장을 찾아 뒤져보며 역사는 선악과 구분 없이 강력한 권력 힘이라는 야릇한 존재 앞에는 무참하게 쓰러지지만 언젠가는 다시 복원되고 만인들에게 밝게 드러나 귀감의 인물로 우뚝 서는가하면 당대에서는 명성을 휘날렸지만 덕으로서 행하지 않은 행장의 위인은 역사에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질타멸시의 존재로 변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렇게 행할까 생각하며 어우당선생이 남긴 시문집과 그의 후손 류금과 류영무가 선생의 유문을 모아 어렵고 힘든 편찬 작업을 하여 책으로 엮어냄으로서 청구역사에 어우당선생의 맑은 행장이 길이길이 소게만고(昭揭萬古)하리라 굳게 믿고 존숭하며 휘호하고 성어문집에 담는다


桓紀 9217년 9월 5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