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람비징청 攬轡澄淸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0. 23. 11:02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람비징청 攬轡澄淸


잡을 람攬 고삐 비轡 맑을 징澄 맑을 청淸

고삐를 잡고 세상을 맑고 맑게하다 라는 의미인 말의 고삐를 잡아 천하를 바르게 다스리겠다는 포부를 말한다

이 성어는 후한서(後漢書) 범방전(范滂傳)에 나오지만 본 문집에서는  본 문집에서는 조선조 대동야승 기묘록보유권상(己卯錄補遺卷上) 기묘록금정국찬보유안로찬(己卯錄金正國撰補遺安璐撰)에 안당전(安瑭傳)에서 발췌하다 

辛巳秋 沈貞嗾執義尹止衡 削奪官爵 신사추 심정주집의윤지형 삭탈관작 
是冬聞其胤處謙語觸時宰 시동문기윤처겸어촉시재 
驚駭仆地 경해부지 
卽欲上達 以其言語間無實之事 즉욕상달 이기언어간무실지사 
恐惹釁隙 復起士林之禍 공야흔극 부기사림지화 
遂率歸外鄕 欲使消沮而無虞也 수솔귀외향 욕사소저이무우야 
豈意所親信者 鼓吻於左右 기의소친신자 고문어좌우 
按釖者瞋目以相待耶 안도자진목이상대야 
公平生不顧生產作業 祿俸之外 更無營畜 공평생불고생산작업 록봉지외 경무영축 
位至崇品 益著淸儉 위지숭품 익저청검 
夫人之喪 無以爲措 부인지상 무이위조 
至於假貸治喪 諸公莫不嘆服 지어가대치상 제공막불탄복 
性且剛直 惟國耳公耳 성차강직 유국이공이 
慍于群小 竟陷大禍 온우군소 경함대화
嗚呼痛哉 公嘗按察湖西 有詩曰 오호통재 공상안찰호서 유시왈 
攬轡澄淸吾豈敢 람비징청오기감
只將忠義不謀身 지장충의불모신 
亦可謂言至矣 역가위언지의

신사년 가을에 심정이 사헌부 집의 윤지형을 부추겨서 안당선생의 관직을 삭탈 당하게 하였다
이해 겨울에 맏아들 처겸이 당시 재상에게 저촉되었다는 말이 들려 
공이 너무 놀라서 땅에 넘어지기도 하였다
곧 상달하고자 보니 그 말의 말이지 실상이 없는 일이므로
틈이 벌어져서 다시 사림의 화라도 일어날까 두려워서
드디어 가족을 거느리고 시골에 돌아가서 두려움 없이 조용히 몸을 낮춰 살려고 하는데 
친하게 믿던 자가 좌우에서 입을 놀리고 
칼을 빼어든 자가 눈을 부릅뜨고 기다릴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공은 평소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아 녹봉 외에는 저축한 것이 없었으니
벼슬이 높은 품계에 이르렀으나 청렴과 검소함이 저절로 더욱 드러났다
부인이 장사지낼 적에도 어떻게 조처할 길이 없어
남에게 빌려서 장사를 치렀으니 모든 사람들이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품이 또 굳세고 곧아서 오직 국사와 공익뿐이었으나
소인배들에게 미움을 받아 마침내 큰 화를 입으셨으니
오호 슬프도다 공이 일찍이 호서를 조사하고 살필 때에 시를 짓기를
고삐를 잡고 세상을 맑고 맑게 하기를 내 어찌 감히 하랴
다만 장차 충과 의로 다할 뿐 몸을 위한 꾀는 하지 않으리라 
하셨으며 또한 말이 지극하다 라고 이를 수 있다 

이 성어는 후한서(後漢書) 범방전(范滂傳)에 범방이 수레에 올라가서 말고삐를 잡고 개연히 천하를 바르게 하겠다는 뜻을 펼쳤는데 이 방등차람비 개연유징청천하지지(滂登車攬轡 慨然有澄淸天下之志)의; 문장에서 수레에 올라가서 말고삐를 잡았다는 람비(攬轡)와 천하를 바르게 하겠다는 징청(澄淸)이 합해져서 생긴 말이다

본 성어문집에서는 대동야승 기묘록보유권상(己卯錄補遺卷上)에 기묘록금정국찬보유안로찬(己卯錄金正國撰補遺安璐撰)에 안당전(安瑭傳)에서 발췌하였는데 안당전의 주인공이신 정민(貞愍)공 영모당 안당(永慕堂 安瑭 1460~1521)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흥이며 안향의 후손이고 1480년 성균시에 합격하고 1481년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이 되고 1499년 사성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이후 대사간을 지내고 1506년 중종반정 후 정국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으며 1507년 이과의 옥사를 다스려 정난공신 3등에 책록되고 호조판서 병조판서 공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1518년 우의정이 되고 1519년 좌의정에 올랐는데 기묘사화로 투옥된 조광조와 그의 신진 세력들을 구하려다가 파직당하고 1521년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아들과 함께 사약을 받고 사형 당했으나 후에 선조 즉위 후 사면 복권되었다 

문정(文靖)공 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 소요정 심정(逍遙亭 沈貞 1471~1531)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며 공신으로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연산군 8년(1502) 알성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舊義靖國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연산군 12년 중종반정에 동조 가담하여 정국공신 3등관에 녹선되고 화천군에 봉군되었으며 1507년 중추부지사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 온 후 1518년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등을 거쳐 이조판서에 이름이 올랐으나 안당(安瑭)의 거부로 임명되지 못하였으며 조광조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 정국공신 훈호도 삭탈되자 원한을 품고 홍경주 등과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인사를 모조리 숙청하였는데 안당선생도 큰 피해를 보게 되었으며 이때 사림파 중에서도 조광조선생 일파를 부정적으로 보는 남곤 김전 등을 끌어들였으며 1527년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이 되어 화천부원군에 진봉되었으며 남곤의 사후 조정을 장악하였으나 김안로의 탄핵으로 강서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경빈 박씨와 통정하였다는 모함을 받아 사사되었는데 그러나 조광조 일파를 숙청한 탓에 김안로가 사사된 뒤에도 많은 사림의 미움을 받아 신원되지 못하고 남곤과 함께 곤정(袞貞)으로 일컬어져 소인의 대표적 인물로 오랜 세월동안 매도되었지만 형제간에 우의가 지극하여 곤경에 처한 동생 심의(沈義)를 끝까지 보살펴주었으며 교묘한 꾀를 잘 내어 지혜주머니 지낭(智囊)이라 불렸다고 한다

말의 고삐를 잡고 세상을 맑고 바르게하다 라는 오늘의 성어 람비징청(攬轡澄淸)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말이며 실행해야 할 말이다 위의 피비린내 나는 사화에 연류 된 인물의 행장을 읽으면 개인보다 남을 위한 덕과 배려가 좀 부족하지 않았나하고 나름 정리하며 남도 배려하면서 정의를 위한 람비징청(攬轡澄淸)을 부르짖으며 실행해 나아갔으면 좋으련만 그 정의가 공공 민족을 위한 정의가 아닌 개인의 영달과 연관된 정의로 정의를 내리는 그 예전이나 지금 오늘날 이 사회의 시류가 안타깝다 토로하며 그래도 사회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스스로 고삐를 잡고 자기 자신부터 바르고 맑게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람비징청(攬轡澄淸)을 문집에 담고 휘호로 기록에 남긴다


桓紀 9217년 9월 7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