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웅혼왕양 雄渾汪洋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1. 3. 10:23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웅혼왕양 雄渾汪洋


수컷 웅雄 흐릴 혼渾 넓을 왕汪 바다 양洋

기운과 품격이 웅장하고 막힘이 없는 넓고 큰 바다

이 성어는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22권 연산군 3(1497)년 3월 14일 丙辰 4번째 기사 예조 참판 신종호의 졸기에서 발췌하다(태백산사고본)

禮曹參判申從濩卒 예조참판신종호졸 
從濩字次韶 高靈人 文忠公 叔舟之孫 종호자차소 고령인 문충공 숙주지손 
少好讀書 徧閱群書 소호독서 편열군서
至忘寢食 文忠器之 지망침식 문충기지
甲午連魁進士初 覆試 庚子魁文科試 갑오련괴진사초 복시 경자괴문과시 
選入弘文館 爲修撰 累歷至應敎 선입홍문관 위수찬 루력지응교 
乙巳魁重試 弘治戊申拜直提學 尋陞副提學 을사괴중시 홍치무신배직제학 심승부제학 
己酉遷承政院同副承旨 轉至都承旨 기유천승정원동부승지 전지도승지 
庚戌拜禮曹參判 轉司憲府大司憲 경술배례조참판 전사헌부대사헌 
遷兵曹參判 京畿觀察使 重拜禮曹參判 천병조참판 경기관찰사 중배례조참판  
丙辰冬以賀正使赴京 병진동이하정사부경
回至開城府 病卒 年四十二 회지개성부 병졸 년사십이 
氣度宏遠 執守剛毅 不以事物嬰懷 기도굉원 집수강의 불이사물영회 
胸次坦然 無城府畛域 疾惡如讎 흉차탄연 무성부진역 질악여수
未嘗以人言撓法 미상이인언요법 
按京畿 守令有怙勢貪縱者 안경기 수령유호세탐종자 
立黜之 一道肅然 립출지 일도숙연
爲文章雄渾汪洋 自成一家 위문장웅혼왕양 자성일가 
詩尤奇麗豪健 士林景慕 시우기려호건 사림경모

예조 참판 신종호가 졸하였다
종호의 자는 차소 고령신씨로 문충공 신숙주의 손자이다 
젊어서 독서를 좋아하여 두루 여러 서적들을 열람하였는데
먹고 잠자는 것까지 잊었다 하니 문충공이 쓸 만한 인재로 생각했다
갑오년에 진사 초시 복시에 연달아 장원하고 경자년 문과 시험에 장원하여 
홍문관에 선발되어 들어가 수찬이 되고 여러 번 옮겨 응교에 이르렀다 
을사년 중시에 장원하고 홍치 무신년에 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부제학에 올랐다 
기유년에 승정원 동부승지로 선발되어 도승지에 이르러 전임되었고
경술년에는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대사헌에 전임되었으며
병조참판 천거되고 경기 관찰사를 거듭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병진년 겨울에 하정사로 명나라 나아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개성에서 병으로 졸하니 나이가 42세였다
기개와 도량이 넓고 원대하며 절조를 지키고 의지가 굳세어서 사물로서 욕심 부리지 않았다
흉금이 평탄하여 어떠한 거리가 없으며 나쁜 것을 원수처럼 미워하고
일찍이 사람의 말로써 법을 어지럽게 하지 않았다 
경기도를 안찰할 때에 수령 중 권세를 믿고 탐하고 방종한 자를 놀랠 일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쫓아내니 온 도내가 숙연하였다
문장이 기운과 품격이 웅장하고 막힘이 없는 넓고 큰 바다 같아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고 
시는 더욱 기이하고 아름다우며 호방하고 씩씩하여 사림에서 우러러 흠모하였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 예조 참판 신종호의 졸기에서 발췌하였는데 삼괴당 신종호(三魁堂 申從濩1456-1497)선생은 고령이 본관이고 자는 차소(次韶)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봉례랑(奉禮郎) 신주(申澍)이고 어머니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이다 성종 5년(1474) 약관으로 성균진사시에 장원하고 1480년 식년문과에 다시 장원 그 해 감찰에 임명된 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이듬해 천추사(千秋使) 홍귀달(洪貴達)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을 때 그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수료병(水潦病)에 걸려서 돌아오지 못하고 고생하는 자가 많았는데 명나라 예부(禮部)에 건의하여 그들을 치료하게 한 뒤 모두 귀환하게 하였으며 명나라에서 돌아온 뒤 수찬(修撰) 교리를 역임하고 1486년 부응교로 있을 때 또다시 문과중시에 장원하여 과거제도가 생긴 이후 세 번이나 장원을 한 것은 처음이라며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그 해에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으로 초배(超拜 차례를 뛰어넘어 제수됨)되었고 여지승람을 정정하여 동국여지승람으로 다시 찬술해내는데 참여하였으며 왕명으로 요동(遼東)에 가서 한어(漢語)를 습득하고 1487년 홍문관직제학을 거쳐 이듬해 부제학 동부승지가 된 뒤 예조참의 좌승지 우승지 도승지를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1491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 북쪽 오랑캐 침입 사건에 관한 어전회의 중에 영의정을 모욕한 죄로 파면되었으나 얼마 뒤 다시 등용되어 도승지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병조 예조 이조참판 경기도관찰사 예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로 있으면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연산군 2년(1496) 병환을 무릅쓰고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인 1497년에 돌아오던 중에 개성에서 죽었다 마음이 너그럽고 후덕한 장자의 풍모를 지녔으며 문장과 시 글씨에 뛰어나고 저서로 삼괴당집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참조]

허약한 몸으로 나라를 위해 소임을 다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삼괴당 선생 같으신 분들이 더 오래 사셨다면 또 이 세상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 등등 혼자 재미있는 생각들을 하면서 오늘의 성어 기운과 품격이 웅장하고 막힘이 없는 넓고 큰 바다 같다라는 의미의 웅혼왕양(雄渾汪洋)은 비단 문장 학문에만 국한 되어 쓰이는 성어가 아니라 사회와 단체 개인 어떤 곳에서도 쓰일 수 있는 좋은 말임에 선택하고 또 발췌문을 가져와서 풀이하고 이것저것 주인공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보니 아픔 몸일 진정 최선을 다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에 임하는 자세가 너무 아름다워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본받으며 또 함께 공유하고 삼성신께서 물러 준 청구들녘이 교화로 아름다운 세상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웅혼왕양(雄渾汪洋)을 성어문집에 담고 휘호로 남긴다 

桓紀 9217년 9월 18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