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마기알골 磨肌戛骨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1. 16. 09:59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마기알골 磨肌戛骨


갈 마磨 살(근육) 기肌 창 알戛 뼈 골骨

살갗을 부비며 뼈를 서로 부딪치며 가깝게 사는 매우 친밀한 골육 형제사이를 말한다

이 성어는 고문진보(古文眞寶)전편에 당나라 한유(韓愈768~824)의 송궁문(送窮文)에서도 나오지만 본 문집에서는 조선조 문신인 무명자 윤기(無名子 尹愭 1741∼1826)선생의 시문집인 무명자집(無名子集) 문고 책륙(文稿 册六)에 자기 자신에게 긴요한 것만 추구하는 풍속을 논함(論緊俗)에서 발췌하다

有些少利害 유사소리해
則平日之擯不齒數 視若路人者 즉평일지빈불치수 시약로인자 
猝變爲磨肌戛骨之親 졸변위마기알골지친 
有微細機關 유미세기관 
則他時之脅肩諂笑 待如父師者 즉타시지협견첨소 대여부사자 
忽化爲按劒切齒之讐 홀화위안검절치지수 
有前門揖而後門關者 有舊雨來而今雨絶者 유전문읍이후문관자 유구우래이금우절자 
不喜而强笑 已知而陽驚 불희이강소 이지이양경 
外似誠而內實詐 迹則東而心反西 외사성이내실사 적즉동이심반서 
或賺以誘之 或嚇以脅之 혹잠이유지 혹혁이협지 
或餌而釣之 或撫而奴之 혹이이조지 혹무이노지 
一盃之待 盡有妙理 일배지대 진유묘리 
一番之訪 悉出深意 일번지방 실출심의 
今日之不切於己者 立視其死而不以爲意 금일지불절어기자 립시기사이불이위의 
後來之有所顧望者 후래지유소고망자 
忘讐忍辱而甘爲死士 망수인욕이감위사사

사소한 이해만 있으면 
평소엔 언급도 하지 않고 배척하면서 지나가는 행인처럼 보더니 
갑자기 살갗을 부비며 뼈를 서로 부딪치며 가깝게 사는 골육의 친착인 것처럼 살갑게 변하고
아주 미세한 기미 낌새만 있으면 
전날에 어깨를 움츠리고 아첨하며 웃고 어버이와 스승처럼 섬기며 공손하게 모시던 이도
갑자기 칼을 쥐고 이를 가는 원수처럼 여긴다 
앞문에서 읍하고 뒷문에서 빗장을 지르고 예전에는 은택을 주다가 지금은 은택을 끊어버리고
기쁘지 않으면서 억지로 웃고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놀라며 금방 들은 척 한다
바깥에서는 진심인 듯하고 속으로는 거짓되고 또 동쪽으로 가는듯하나 서쪽으로 향하고 
혹 속여서 유혹하고 혹 공갈하여 협박하기도 하며
혹 미끼를 던져 낚기도 하고 혹 어루만져 주는 척하면서 부려먹기도 한다
한 잔의 술대접에 오묘한 이치가 다 들어 있고 
한 차례의 방문에 깊은 속내를 모두 다 드러낸다 
당장 자신에게 간절하지 않은 사람이면 죽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개의치 않고
뒷날에라도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면 
원수도 잊고 욕됨도 참으면서 그를 위해 죽는 시늉도 싫다하지 않고 달게 여긴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조 문신인 무명자 윤기(無名子 尹愭 1741∼1826)선생이 쓴 시문집인 무명자집(無名子集)안에 자기 자신에게 긴요한 것만 추구하는 풍속을 논(論緊俗)하는 글에서 발췌를 하였는데 무명자 윤기선생은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경부(敬夫) 호는 무명자(無名子) 아버지는 윤광보(尹光普)이며 어머니는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원일서(元一瑞)의 딸이며 이익(李瀷)에게 사사하였고 영조 49년(1773)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20여 년간 학문을 연구하였으며 1792년(정조 16)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첫 벼슬길(初仕)로 승문원정자를 거쳐 종부시주부 예조 병조 이조의 낭관으로 있다가 남포현감 황산찰방을 역임하였으며 이 후 다시 조정에 들어와서 정조실록의 편찬관을 역임하였고 벼슬이 호조참의에까지 이르렀으며 저서로 무명자집(無名子集) 20권 20책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당나라 한유(韓愈768~824)는 자는 퇴지 한문공이라고도 하며 중국과 일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후대 성리학(性理學)의 원조이며 처음 과거에 응시했을 때는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문체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낙방하다가 25세에 진사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이부시랑까지 지냈으며 사후에 예부상서로 추증되고 문이라는 시호를 받는 영예를 누렸는데 유학이 침체되어가던 시기에 유학을 옹호했던 그는 헌종(憲宗)이 불사리(佛舍利)에 참배한 데 대해 끝까지 간한 일로 인하여 1년 동안 차오저우[潮州] 자사(刺史)로 밀려나 있었으며 이로 인하여 평생을 불우하게 지내야 했다 유학을 옹호하기 위해 그 당시의 유학자들이 다소 소홀히 하던 맹자 대학 중용 주역을 광범위하게 인용하였는데 후대의 성리학자들은 기초개념을 이 책들에서 취했고 한유는 성리학의 기초를 놓은 셈이 되었으며 당시에 유행하던 규칙적인 운율과 고사성어로 가득 찬 변려문을 배격했고 옛 학자들처럼 자유롭고 간결한 문체의 사용을 주장하였으며 그가 쓴 원도(原道) 원성(原性)등은 중국문학의 백미이며 그가 주장한 고문체 문장의 대표작이 되었으며 시문학에서도 그는 기존의 문학적 형식을 뛰어넘으려고 했지만 문학에서 그가 기울인 노력의 많은 부분은 아쉽게도 그의 주장으로만 그쳤다 [다음백과 참조]

살갗을 부비며 뼈를 서로 부딪치며 가깝게 사는 매우 친밀한 골육 형제사이를 말하는 오늘의 성어 마기알골(磨肌戛骨)은 요즈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설명하기가 어려운 성어로 자리 잡을 것 같아 씁쓸하지만 예전에는 조그마한 방에서 많은 형제들이 살을 서로 비비고 뼈가 서로 부딪칠 정도로 장난치고 형제 남매의 자연스런 사랑을 나누며 형제애를 터득하면서 자라났는데 오늘날에는 소가족에 저 출산으로 아이가 형제자매 오누이간에 나눌 정분을 터득할 기회가 없으니 살갗을 부딪치고 자라나면서 배운 형제간에 사랑의 깊이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걱정하며 살가운 아름다운 사랑 형제애를 이웃 간에도 진정으로 나눈다면 우리가 사는 사회는 영원히 아름다우리라 믿으며 가끔씩 그렇지 못한 일부 부류들이 자기들 이익을 위해 발췌문 글처럼 마기알골(磨肌戛骨)로 접근하지 않기를 바라고 또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길 바라며 성어문집 백운필담에 담고 휘호로 남긴다

桓紀 9217년 10월 2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