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거리당색 據理搪塞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1. 12. 10:48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거리당색 據理搪塞


의거할 거據 다스릴 리理 뻗을 당搪 막힐 색塞

이치에 맞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빈틈없이 막다

이 성어는 대동법을 완성한 조선 최고의 개혁가인 잠곡 김육(潛谷 金堉1580~1658)선생의 시문집 잠곡선생유고(潛谷先生遺稿) 권십일(卷十一)에 호조 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민성휘의 시장(戶曹判書贈領議政閔公諡狀)에서 발췌하다

壬申夏 公巡入劍山城 임신하 공순입검산성 
金人謀襲椵島 금인모습가도 
潛師夜入 結陣於城下 잠사야입 결진어성하 
時築城纔完 시축성재완 
儲峙守禦之具未備 저치수어지구미비 
城中之人 震驚號哭 성중지인 진경호곡 
公略不動色曰 공략불동색왈 
此必爲椵島來 何懼焉 차필위가도래 하구언 
單騎入營 見其將曰 단기입영 견기장왈 
國有疆域 今爾何來 국유강역 금이하래 
曰 欲借船而屠島衆 왈 욕차선이도도중 
公曰 我國 於爾國兄弟也 공왈 아국 어이국형제야 
於天朝父子也 어천조부자야
其輕重何如哉 기경중하여재 
據理搪塞 거리당색 
其將不敢強 遂退去 기장불감강 수퇴거

인조 10년 임신(1632)해 여름에 공이 순시를 하면서 검산산성에 들어갔는데 
청나라 사람들이 가도를 습격하고자 꾀를 부리면서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밤에 들어와 성 아래에다가 진지를 만들었다 
그 때에는 성 쌓는 일이 겨우 끝날 즈음이라 
군량미와 방어하는 무기가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놀라 떨면서 울었는데 
공은 안색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다스리며 말하길 
저들은 반드시 가도를 치기 위해 왔으니 어찌 두려운가 하였다
혼자서 말을 타고 청나라 군영으로 들어가 청나라의 장수를 보고 말하길
나라에는 국경이 있는 법인데 지금 너희들이 무슨 이유로 이곳에 왔는가 물으니 
청나라 장수가 말하길 배를 빌려서 가도에 있는 명 군사들을 도륙하고자한다고 하자
공이 말하길 우리나라는 너희 나라와는 형제 관계에 있고 
명나라에 대해서는 부자 관계이다 
그러니 그 가볍고 무거움이 어떠한가 하면서
이치에 맞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빈틈없이 막자
청나라의 장수가 감히 강하게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드디어 퇴각하였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잠곡 김육(潛谷 金堉1580~1658)선생이 호조 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졸당 민성휘(拙堂 閔聖徽 1582~1647)선생의 시장(戶曹判書贈領議政閔公諡狀)을 찬한 글에서 발췌를 하였는데 졸당 민성휘선생은 본관은 여흥(驪興) 초명은 민성징(閔聖徵) 자는 사상(士尙) 호는 졸당 용졸(用拙)이고 부는 호조정랑 민유부(閔有孚)이며 어려서 부모를 잃고 아버지의 사촌동생인 도정 민유경(都正 閔有慶)의 집에서 자랐으며 선조 39년(1606) 생원이 되고 광해군 1년(1609)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보임되고 사관 행호군 사용을 지냈으나 조정 내의 부조리를 보고 외직을 희망하여 강원도사 영변판관과 금산 여주의 목사 지내다가 1617년 외직생활을 사직하고 낙향한 후 강원도관찰사가 재직 기간 중의 치적을 국왕에게 상계해 통정(通政)에 올랐으며 인조 1년(1623) 인조반정을 계기로 동부승지에 참찬관을 겸하였다가 우승지가 되고 1624년 개성부유수 재직시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관내에 있던 반란파를 상계하기 전에 죽인 죄목으로 파직당하였으며 1625년 전라도관찰사 그 후 형조참판을 지내던 중 1627년 명나라 숭정제(崇禎帝)의 즉위를 축하하는 등극사행의 부사로 해로를 택해 가던 중 폭풍를 당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아 모든 사람들이 탄복하였다고 하며 1630년 평안도감사가 되어 부체찰사를 겸임하며 의주성을 수축하고 백마 검산 자모의 3성도 수축하고 선사 광량등지에도 진을 설치하자고 주장하는 등 관서 30여 군의 변방강화에 힘썼으며 1631년 가도(椵島)를 다스리는 데에도 역량을 발휘하였으며 다음 해도 꾸준히 노력해 가도의 한장(漢將)도 무모한 요구를 하지 못하고 돌아갔으며 그 뒤 함경도감사를 지낼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사 서우신(徐祐申)과 함께 보병과 기병 1만 3000명을 통솔하고 맹활약을 하였고 난중에 병으로 감사의 자리에서 잠시 물러났다가 1637년 다시 평안도감사로 복직하면서 양서관향사를 겸하였고 1640년 척화파로 심양(瀋陽)에 잡혀갔다가 1642년에 귀환한 후 호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지냈다가 1647년 사은부사로 북경(北京)에 가는 도중 영평부(永平府)에 이르러 병이 났으나 북경에 도착해 그곳에서 안타깝게도 병사하였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평양과 정주에 생사당(生祠堂)이 건립되었으며 저서로는 송경방고록(松京訪古錄)이 있으며 시호는 숙민(肅敏)이시다 선생의 시장과 행장을 찾아 읽어보니 참으로 공직자로서 청구들녘에 백성으로서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하신 대단한 어르신임에 경의를 표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이치에 맞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빈틈없이 막다라는 오늘의 성어 거리당색(據理搪塞)은 우리들이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닐까 이런 강력한 방어자세를 가지려면 다방면으로 다양한 지식과 학식을 쌓고 사물의 이치를 정확히 이해하고 우주의 섭리를 터득한 후 변화무쌍한 세상사에 적응해 나가는 기지와 지혜를 발휘하는 것은 개인과 단체와 국가에 큰 자산이 되듯 졸당선생님 같이 어떤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의연한 자세로 급한 위기 속에서도 내색하지 않고 해결해 나가는 자세는 가슴에 담아두고 싶다 늦었지만 더 열심히 학습에 임하여 사는 그 날까지 즐겁게 해야 할 일을 마다하지 않고 마무리하는 자세로 살아 갈 것을 스스로 부추기면서 거리당색(據理搪塞)을 휘호하고 민족사에서 나의 존재를 생각하며 성어문집에 담아 놓는다  

桓紀 9217년 9월 27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