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지회순절 指誨諄切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1. 18. 10:58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지회순절 指誨諄切

가리킬 지가르칠 회타이를 순끊을 절

 

친절하게 타이르고 절실히 가르쳐 주다

 

이 성어는 조선중기 문신이며 학자인 약포 정탁(藥圃 鄭琢1526~1605)선생의 시문집 약포선생문집(藥圃先生文集) 권사(卷四)에 오덕계 사적의 대략(吳德溪實跡大略)에서 발췌하다

 

公天性彊毅 執德不撓 공천성강의 집덕불요

學術醇正 爲一時諸公所推 학술순정 위일시제공소추

嘗爲星州敎授 黃錦溪時爲州牧 상위성주교수 황금계시위주목

相與講劘朱子書 不廢寒暑 상여강마주자서 불폐한서

及爲成均直講 許草堂爲大司成 급위성균직강 허초당위대사성

講論大學章句 議論無不當理 강론대학장구 의론무불당리

草堂稱之曰 吾儕無比 초당칭지왈 오제무비

後爲弘文館侍講官 入侍經帷 후위홍문관시강관 입시경유

講論精熟 時望蔚然 강론정숙 시망울연

平生以勉進後學爲心 평생이면진후학위심

雖從仕匪懈之日 苟有來問者 수종사비해지일 구유래문자

指誨諄切 지회순절

尤致意於家禮 小學 四書等書 우치의어가례 소학 사서등서

謝仕在家之日 學徒日集 사사재가지일 학도일집

雖在寢疾 答問不倦 수재침질 답문불권

後生多有開發 至有傳業名世者 후생다유개발 지유전업명세자

 

공은 천성이 굳세고 의지가 강하였으며 덕을 지키는 것이 확실하며

학술이 순수하고 발라서 그 때 제공들의 추천을 받았다

일찍이 성주 교수가 되었을 때 금계 황준량(1517~1563)이 그 때 성주 목사가 되었는데

서로 더불어 주자서를 강론하였는데 춥거나 더워도 그만두지를 않았다

성균관 직강이 되었을 때는 초당 허엽(1517-1580)이 대사성으로 있었는데

대학장구를 강론함에 의론이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초당이 그를 칭찬하길 우리 동배들이 견줄 수가 없다 고 했다

뒤에 홍문관 시강관이 되어 경악에 입시했을 때도

강론이 정밀하고 익숙하여 그 당시 촉망이 대단하였다

평생토록 후학들이 나아가게 하는데 온 마음으로 힘씀으로서

비록 벼슬살이 바쁜 날에도 구차스럽지만 누가 와서 묻는 자가 있으면

친절하게 타이르고 절실히 가르쳐 주다

더우기 가례 소학 사서 등 서적에 뜻을 두었는데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을 때에도 배우려는 사람들이 날마다 모였다

비록 병을 앓고 있어도 물음에 답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많은 후생들이 개발이 있었고 지극히 학업에 전념하여 이름을 세상에 난 자도 있었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약포 정탁(藥圃 鄭琢1526~1605)선생이 덕계 오건(德溪 吳健1521~1574)선생의 발자취에 대해서 기록한 오덕계실적대략(吳德溪實跡大略)에서 일부를 발췌하였는데 덕계 오건선생은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강(子强)이고 아버지는 오세기(吳世紀)이며 어머니는 성주도씨(星州都氏)로 훈도 도영강(都永康)의 딸이다 덕계선생은 11세에 부친상을 당했으나 효성으로 소문이 났으며 모친상 때에는 더욱 예의에 힘써 명종 4(1549) 예조의 포상과 함께 왕으로부터 복호(復戶 조세나 역을 면제함)를 받았으며 14세 때부터 경()()()에 몰두했으나 집이 가난해 선생을 모실 수 없었으나 홀로 중용을 수백 번 반복 연마해 통달하고 대학 논어 맹자 등도 연구하였으며 이후 남명선생이 덕산동에서 강론하자 문인으로 수학했으며 김인후(金麟厚) 이황(李滉)의 문인이기도 하며 이황도 오건의 학문이 정밀하고 심오함을 칭찬하였으며 155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67년 승정원주서가 된 뒤 정언 헌납 지평 교리 직강 사성 및 호조 예조 병조 공조의 좌랑 검상 사인 등을 역임하며 선조 4(1571) 이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해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경연(經筵)에서 학문의 길은 궁리(窮理)와 거경(居敬)에 있다고 논했으며 소를 올려 학문을 진흥시키고 간쟁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는데 조정의 분위기가 직언을 싫어하고 사류(士類)들을 외면하는 경향이 강해지자 1572년 이조정랑으로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경상도 산음 덕계리(德溪里)로 낙향하곤 여러 차례 조정에서 불렀으나 모두 거절하고 서사(書史)를 섭렵하면서 시작(詩作)과 강론으로 여생을 마쳤다 문인들이 덕계선생(德溪先生)이라 불렀으며 사후 산천의 서계서원(西溪書院)에 제향되고 저서로는 덕계문집 정묘일기(丁卯日記)등이 있다

영중추부사에 오르고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에 녹훈되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지고 사후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 되시고 저서로 약포집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을 남기시며 시호는 정간(貞簡)이시며 발췌문의 저자이신 약포 정탁선생은 다음 기회에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친절하게 타이르고 절실히 가르쳐 주다 라는 오늘의 성어 지회순절(指誨諄切)은 교육사업에 관련되고 교육자로서 또는 종사자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첫째 덕목임은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교육자가 아닐지라도 사람이 사람에게 묻는다면 알고 있는 지식을 자세하게 알려주고 가르쳐 주고 가리켜준다면 묻는 이에게는 대단한 공부가 되고 지식이 쌓이게 되며 생활하는데 윤택제가 되어 이 사회는 더욱 광명의 세상으로 변화 되어 가는 것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가끔씩은 당연히 알고 있으면서도 정확하게 알려주고 가르치고 가리켜서 타일러주어야 마땅한대도 자기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아니 되거나 지키는데 불이익이 초래함이 오면 자기 이익에 맞게 이야기하는 부류들이 예전이나 요즈음이나 인간이 사는 곳에는 허다한 일이지만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나고 인간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더 인간답게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의 이익이 합당하지 않다면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큰 가슴을 가진 사람이 되어주길 바라면서 오늘의 좋은 말씀 지회순절(指誨諄切)을 휘호하고 백운필담에 담는다

 

 

桓紀 9217104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