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완인정사 完人正士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1. 21. 10:37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완인정사 完人正士


완전할 완完 사람 인人 바를 정正 선비 사士

덕행이 온전하게 아름다운 사람과 바르고 정직한 선비

이 성어는 조선 중기의 학자 지봉 이수광(芝峯 李睟光 1563~1628)선생의 시문집 지봉선생집(芝峯先生集)부록권일(附錄卷一)에 행장 장유(行狀 張維)에서 발췌하다

維後生蒙昧 유후생몽매 
幸而及公之晩節 而獲承緖論 행이급공지만절 이획승서론 
其講說義理 揚搉文章 기강설의리 양각문장 
精深超詣 脫離科臼 정심초예 탈리과구 
有自得之趣 유자득지취 
非記聞騰口者之所能及也 비기문등구자지소능급야 
因以槪公之生平 則其恬沖之資 인이개공지생평 즉기념충지자 
潔貞之操 行義足以範俗 결정지조 행의족이범속 
文章足以垂後 立朝四十四年 문장족이수후 립조사십사년 
屢經世變 而出處言行 루경세변 이출처언행 
無少玷纇 卽善毀者 무소점뢰 즉선훼자 
無所容其喙 若公者 무소용기훼 약공자 
非所謂完人正士 文質彬彬之君子者耶 비소위완인정사 문질빈빈지군자자야 
謹據家狀 摭其表著者 근거가상 척기표저자
論撰如右 以請易名之典 론찬여우 이청역명지전

몽매한 후생으로써
다행히 공께서 연세가 그윽하게 드셨을 때 서론을 공경히 들었는데
그 의리를 강설하고 문장을 품평하고 드러냄이 
정심하고 초예의 경지에 이르며 평범한 생활에서 이탈하여 
스스로 터득한 다다름의 경지가 있으셨으며
들은 말을 기억했다가 주둥아리에 올리는 무리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인하여 공의 평생 삶을 개괄하여보면 공은 편안하고 깨끗하며 청허한 자질과 
고결하고 곧고 굳은 지조에 행하고 의로움이 세상에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시고 
문장은 후세에 베풀기에 만족하며 조정에 나선지 44년
누차 세상의 격변을 겪으면서도 출처와 언행이 
조금도 어그러진 흠이 없어서 즉 헐뜯기를 좋아하는 자도 
그 입을 여는 바가 없었으니 공과 같으신 분은 
이른바 온전한 사람 정직한 선비 문질 빈빈한 군자가 아니시겠는가
삼가 가장에 의거하여 그 현저하게 드러난 사실들을 모아서 
이상과 같이 행장을 밝혀 써서 역명(시호)의 은전(교지)을 청하는 바입니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계곡 장유(谿谷 張維1587~1638)선생이 조선 중기의 학자 지봉 이수광(芝峯 李睟光 1563~1628)선생의 행장을 찬한 글을 지봉선생집(芝峯先生集)부록권일(附錄卷一)에 행장 장유(行狀 張維)에서 발췌하였는데 계곡 장유선생은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 외 묵소(默所) 장례원사의 장자중(張自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목천현감 장일(張逸)이고 아버지는 판서 장운익(張雲翼)이며 어머니는 판윤 박숭원(朴崇元)의 딸이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사위로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며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선조 39년(1605) 사마시를 거쳐 광해군 1년(1609)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호당(湖堂 독서당)에 들어가서 이듬해 겸설서를 거쳐 검열 주서 등을 지냈으며 1612년 김직재(金直哉)선생의 무옥(誣獄)에 연루해 파직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해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봉교를 거쳐 전적과 예조 이조의 낭관을 지내고 그 뒤 대사간 대사성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며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이듬해 신풍군(新豊君)에 책봉되어 이조참판 부제학 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왕을 호종하였으며 그 뒤 대제학으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했고 1629년 나만갑(羅萬甲)을 신구(伸救 억울하다고 여긴 죄를 바로잡아 구제함)하다가 나주목사로 좌천되고 다음 해 대사헌 좌부빈객(左副賓客)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1631년 원종추숭론(元宗追崇論)이 대두하자 반대하고 전례문답(典禮問答) 8조를 지어 왕에게 바쳤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공조판서로 최명길(崔鳴吉)과 더불어 강화론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부음(訃音)으로 18차례나 사직소를 올려 끝내 사퇴하고 장례 후 과로로 병사하였다 일찍이 양명학(陽明學)에 접한 그는 당시 주자학(朱子學)의 편협한 학문 풍토를 비판해 학문에 실심(實心)이 없이 명분에만 빠지면 허학(虛學)이 되고 만다 하였으며 또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하여 마음을 바로 알고 행동을 통해 진실을 인식하려 했던 양명학적 사고방식을 가졌는데 이식(李植)은 그의 학설이 주자(朱子)와 반대된 것이 많다 하여 육왕학파(陸王學派)로 지적했으나 송시열(宋時烈)은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程子)와 주자를 주로 했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 고 칭송하였으며 천문 지리 의술 병서 등 각종 학문에 능통하였으며 서화와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李廷龜) 신흠(申欽) 이식 등과 더불어 조선 문학의 사대가(四大家)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많은 저서가 있다고 하나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 계곡만필 계곡집 음부경주해(陰符經注解)가 전하며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충(文忠)공이시다[한국민족대백과 참조]

덕행이 온전하게 아름다운 사람과 바르고 정직한 선비라는 의미의 오늘의 성어 완인정사(完人正士)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아마도 모두들 다 완인정사(完人正士)로 살다가 완인정사(完人正士)의 한 인물로 기록되어 전하길 바라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모두들 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실을 가다듬어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믿으며 필자는 오늘 아침 완(完)자를 휘호하고 世上事가 두리뭉실하기에 온전함을 찾는다라고 필자의 짧은 단상을 첨언하고 조그마한 소품의 작품을 하나 하면서 완(完)이 된다는 것은 어렵지만 완(完)이 되려고 노력하다보면 완(完)의 근처 가까이에서 자리를 잡지 않을까 하며 지나온 과거의 잘잘못은 깊이 뉘우치고 다시는 그런 잘잘못을 저지르는 불행함은 없기를 바라며 언행에 지금부터라도 삼가며 조심조심 경계 경계하여 삼성신이 물러주신 청구들녘에 백운선사란 이름 하나 남기고 싶은 것이 솔직한 필자의 마음이다 白雲仙士(백운선사)라는 필명을 쓰고 보니 오래도록 수행 진리를 통달한 스님인 선사(禪師)를 연상하고 봉선 선(禪)자를 아니 쓰고 신선 선(仙)자를 쓰는 이유가 궁금하여 가끔씩 물어 오는 분들이 있는데 간단하게 설명하면 필자는 첫째 삼성신인 단군의 후손으로 마지막 단군께서 신선이 되어 산으로 가셨기에 그 자손 천손으로서 선(仙)자를 택했고 둘째 첩첩두메산골촌놈이라 신선과 같은 생각으로 살고자 선(仙)자를 택하였음을 설명하며 완인정사(完人正士)로 이름을 남기길 바라는 마음에 휘호하고 백운필담에 담고 늘 끄집어내어 보려한다

桓紀 9217년 10월 7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