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민면구치 黽勉驅馳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1. 17. 11:07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민면구치 黽勉驅馳


힘쓸 민黽 힘쓸 면勉 몰(달릴) 구驅 달릴 치馳

꾸준히 일을 위해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힘쓰다

이 성어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신 삼탄 이승소(三灘 李承召1422~1484)선생의 시문집 삼탄선생집(三灘先生集)권십이(卷十二)에 형조 판서를 사직하는 장(辭刑曹判書狀)에서 발췌하다

竊復自念 深荷寵私 절부자념 심하총사
久享重祿 而不思報效 구향중록 이불사보효 
下負所學 上孤主恩 하부소학 상고주은 
所謂刑戮之民也 소위형륙지민야 
由是 黽勉驅馳 不爲身謀 유시 민면구치 불위신모 
庶策駑鈍 仰答生成 서책노둔 앙답생성 
而復承乏刑部 處非其據 이부승핍형부 처비기거 
以闇劣之資 專煩劇之務 이암렬지자 전번극지무 
雖在壯年 猶不能堪 수재장년 유불능감 
況今衰暮 志氣昏惰 황금쇠모 지기혼타 
兼以不學律令 不諳典故 겸이불학률령 불암전고 
雖欲勉彊 罔知施措 수욕면강 망지시조 
才與器不周 事與心相違 재여기불주 사여심상위 
正如和尙飛鷹 祗取笑耳 정여화상비응 지취소이
古語曰 畫地爲獄 期不入 고어왈 화지위옥 기불입 
又曰 囹圄之中 度日如年 우왈 령어지중 도일여년

몰래 다시 스스로 나를 생각해 보니 깊고 하해 같은 은총을 사사로이 입고
오랫동안 중한 녹을 누리면서도 보답하여 주는 것에 생각을 안했습니다
아래로는 배운 것을 등져버리고 위로는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고 모른 체 하였으니
이른바 형벌로 죽임을 당할 백성입니다
연유가 이러하니 꾸준히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힘쓰며 자기 자신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어리석고 둔함을 채찍질하여 살려 주신 은혜에 우러러 보답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다시 결격이 많은 몸으로 형조에 임명을 받아서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있게 됐습니다
사리에 어둡고 졸렬한 자질을 가진 몸으로 번거롭고 바쁜 업무를 맡는 것은
비록 장년에 있을지라도 오히려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물며 지금 늙고 쇠해서 의지와 기개가 어둡고 게을러
또 율령도 배우지 못하였으며 전고도 외우지를 못하였습니다
비록 굳세게 힘써 일하려고 하여도 시행과 조처를 알지 못하므로
재주와 그릇이 두루 미치지 못하여 일과 마음이 서로 어긋나게 됩니다
정녕 이는 바로 고고한 승려 화상이 새매를 날리는 것과 같아서 마침 웃음거리일 뿐입니다
옛말에 이르길 땅을 그어 놓고 감옥이라고 하면 들어가지 아니하길 원하고 
또 이르길 감옥에 있으면 하루를 보내는 것이 마치 한 해와 같다 고 하였습니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신 삼탄 이승소(三灘 李承召1422~1484)선생이 형조 판서를 사직하기 위해 조정에 올린 사직을 청하는 장(辭刑曹判書狀)에서 발췌를 하였는데 삼탄 이승소선생은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윤보(胤保) 아버지는 병조판서 이온(李蒕)이며 어머니는 이회(李薈)의 딸이며 세종 20년(1438) 17세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세종 29년(1447)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집현전부수찬에 임명되고 부교리 응교 장령(掌令) 집현전직제학 예문관응교를 지내고 세조 4년(1458) 예조참의가 되어 초학자회언해본(初學字會諺解本)을 찬정하였으며 이어 형조와 호조의 참의를 거쳐 1459년 사은사(謝恩使)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조참의 예문관제학 겸 사성을 하고 세조가 지은 병장설(兵將說)을 찬수하였으며 1467년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병을 얻어 위중하자 국왕이 의약을 내렸으며 예종이 즉위하자 예조참판이 되어 명나라와의 외교 사무를 잘 처리하였으며 1471년(성종 2)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양성군(陽城君)으로 봉해지고 이어 예조판서가 되어 지경연사로서 경연 활동을 크게 일으켰으며 1472년 민간에 산재한 조종의 법전을 수집해 춘추관에 보관했으며 제사(諸史)의 간행 보급을 주청하였으며 1475년에는 교육 강화와 해불론(害佛論)을 제의하고 여러 차례 과거를 주관 인재 등용에 힘썼으며 왜인과 야인의 접대를 주관하였으며 이어 우참찬이 되고 1480년 이조 형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하였으며 1480년 주문사(奏聞使)의 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으로 노비 6구와 전지 40결을 하사 받았는데 그러나 정사였던 한명회(韓明澮)의 사헌궁각사건(私獻弓角事件)에 연루되어 간관의 탄핵을 받고 그 뒤 이조판서 형조판서 우참찬 좌참찬으로서 문명을 날렸으나 1483년 병이 심해져 사직을 청하자 한직인 지중추부사로 옮겨져 녹봉을 왕으로부터 특별히 은총을 받았으며 성품은 사물을 접하면 힘써 대체(大體)를 알고자 하였으며 널리 독서해 예(禮) 악(樂) 병(兵) 형(刑) 음양(陰陽) 율(律) 역(曆)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특히 문장으로 이름을 남겼으며 청렴해 집안에 꾸민 것이 없었다고 전하며 저서로는 삼탄집이 있고 시호는 문간(文簡)공이시다

꾸준히 일을 위해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힘쓰다 라는 오늘의 성어 민면구치(黽勉驅馳)는 오늘 날에도 필요한 생활요령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본다 자기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에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는 꾀를 부리지 않고 꾸준히 스스로 돌아다니면서 바쁘게 찾아서 헤쳐 나가야 자기가 하는 일에 성취 할 수 있는 길에 가까이 접근 할 수 있지만 게으르고 꾀부리며 요리조리 회피하고 임기응변식 임시변통을 하는 자들에게는 혹여 상관의 눈에 띄어 그 당시에는 승승장구가 가능할지 모르나 어느 순간에 이르면 드러나게 마련인 것이 세상사에 필연이기에 오직 발췌문의 글처럼 자기 자신을 아끼지 않고 주어진 일을 잘 처리하면 삼탄선생님처럼 사직 장을 올려도 왕이 끝까지 그를 신임하여 한직으로라도 보내어 여생을 살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은택을 주고 그 또한 첨렴 검소하여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매우 어렵겠지만 부지런히 일에 몰두하는 민면구치(黽勉驅馳)한다면 자연히 이겨 낼 수도 있으리라 믿으며 휘호하고 백운필담에 담는다  

桓紀 9217년 [개천대제일] 10월 3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