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충지무자 忠志無疵

백운선사 김대현 2021. 6. 11. 15:50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충지무자 忠志無疵

충성 충뜻 지없을 무흠 자

 

충성스러운 뜻은 흠이 없다

 

이 성어는 조선 중기의 무신 이순신(李舜臣 1545~98)장군의 시문집인 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어제 유명 수군도독 조선국 증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덕풍부원군 행정헌대부전라좌도수군절도사겸삼도통제사시충무공리순신신도비명 병서(御製 有朙 水軍都督 朝鮮國 贈効忠仗義廸毅協力宣武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德豐府院君 行正憲大夫全羅左道水軍節度使兼三道統制使諡忠武公李舜臣神道碑銘 幷序)에서 발췌하다

 

然碑率之有銘 猶傳旂常之遺義 연비솔지유명 유전기상지유의

抑其特者 君之銘之也 억기특자 군지명지야

王朝之篆首曰至德元老 왕조지전수왈지덕원로

徐達之篆首曰忠志無疵 서달지전수왈충지무자

歷千載幾人哉 력천재기인재

嗚呼 若我朝之忠武公李舜臣 功惟應銘法 오호 약아조지충무공리순신 공유응명법

予之銘之 尙亦無媿辭哉 여지명지 상역무괴사재

忠武字汝諧 世爲德水人 충무자여해 세위덕수인

其生 母卞夢 其舅言兒生必貴 기생 모변몽 기구언아생필귀

其命名舜臣 기명명순신

父貞 聞而異之 占之 曰吉 부정 문이이지 점지 왈길

年五十 當仗鉞爲名將 년오십 당장월위명장

忠武旣負此異 충무기부차이

幼倜儻 且有大志 유척당 차유대지

及長 射藝絶倫 中萬曆丙子武科 급장 사예절륜 중만력병자무과

初仕邊 屢立奇功 國人以將才稱 초사변 루립기공 국인이장재칭

文忠公柳成龍力薦于朝 문충공류성룡력천우조

遂擢爲全羅左道水軍節度使 수탁위전라좌도수군절도사

 

그러하나 비에 글을 새겨 명을 하는데 지금도 깃발 폭에다 의로움을 남긴 옛풍습이 전해진다

그 아름다움 중에서도 특별한 것은 왕이 손수 명을 짓고 쓰는 일일 것이다

왕조의 비 머리에 새겨 쓴 전수로 말하자면 지덕원로가 있고

서달의 비 머리에 새겨 쓴 전수로 말하자면 충지무자인데

몇 천 년을 지내오는 동안 이러한 예우를 받은 분이 얼마나 있는가

오호라 우리왕조 충무공 이순신 같은 분은 그 공로가 오직 이 명법에 마땅하다

내가 이 분의 명을 짓고 쓰고자 하는데 오히려 이 글이 부끄럽지나 않을는지 모르겠다

충무공의 자는 여해이고 본관은 덕수인이다

그가 태어날 쯤 어머니 변씨의 꿈에 시아버지 말씀이 애가 태어나면 반드시 귀하게 될테니

이름을 순신으로 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정이 말을 듣고는 이상히 여겨 점을 쳤는데 점괘가 길하였다

나이 50여년에 권위의 지휘봉을 잡고 명장이 되었는데

충무는 이미 애초부터 그 이상한 조짐을 지니고 태어났기에

어려서부터 기개가 뛰어나고 또 큰 뜻을 품었다

자라서는 활 솜씨가 두드러지게 뛰어나 만력 병자년 무과에 급제하고

처음 변두리 근무를 하다가 누차 뛰어난 공을 세워 나라 사람들이 장재라고 칭하였다

문충공 유성룡이 강력하게 조정에 천거하여

드디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발탁되었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정조대왕이 직접 짓고 쓴 조선 중기의 무신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98)장군의 신도비의 일부분이다

 

유성룡선생은 징비록에서 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고 그의 바르고 단정한 용모는 수업근신하는 선비와 같았으나 내면으로는 담력이 있었다 하여 충무공의 인품과 용모를 전하며 수개월간 진을 같이했던 진린은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이 있다(李舜臣有 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고 했으며 명나라 황제에게 이순신의 공적을 자세히 보고하여 명나라 조정에서 도독인(都督印)을 비롯한 팔사품(八賜品)을 내렸다 또한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따르면 그는 찾아오는 막하 장령들과 공사를 논의하며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었고 출전하지 않는 날에는 동헌에 나가 집무했으며 틈을 내어 막료들과 활을 쏠 때가 많았다한다 그는 이러한 진중생활 속에서도 술로 마음을 달래며 시가(詩歌)를 읊었고 특히 달 밝은 밤이면 감상에 젖어 잠 못 이루는 때가 많았다 또 가야금의 줄을 매었고 음악감상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의 난중일기는 거리낌 없는 사실의 기록 당일의 날씨 꿈자리의 음미 어머니를 그리는 회포와 달밤의 감상 투병생활 또 애끓는 정의감과 울분 박해와 수난으로 점철된 7년 전란의 진중 일기로서 그 기록내용이 지니는 사료학적 가치는 물론 일기 문학으로서도 극치를 이룬다

장군의 마지막 전투 노량진해전에서 독전 중 왼쪽 가슴에 적의 탄환을 맞고 전사하면서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은 것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며 세상을 떠난 노량진해전에서 자그마치 태워버린 적선이 200여 척 적병의 머리가 500여 급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장군이 남긴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다음백과 참조]

 

충무공의 직계후손인 감사원장의 묘비명에 필요한 자료를 찾던 중에 발견한 충성스러운 뜻은 흠이 없다 라는 의미인 충지무자(忠志無疵)라는 말을 왕이 신하에게 할 수 있는 최고 예우를 정조대왕으로부터 직접 받은 비록 비문이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오로지 공변된 충성 실행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귀감이 되며 오늘 날 입으로만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며 충성 아닌 충성을 다하는 그들을 보며 다시 충무공과 같은 분들이 더 많이 나와 어지러운 세상사를 바로잡아 주길 바라보면서 붓 들고 휘호하고 백운필담에 담는다

 

桓紀 9218(신축)52일 오후에 白雲仙士 金大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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