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의유흔극 顗覦釁隙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0. 28. 11:05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의유흔극 顗覦釁隙

근엄할 의넘겨다 볼 유피 바를 흔틈 극

 

조용하게 틈을 넘보다

 

이 성어는 조선 중기의 문신 문충(文忠)공 약천 남구만(藥泉 南九萬1629~1711)선생의 시문집인 약천집(藥泉集) 제이십이(第二十二)에 형조 판서 조공 행장(刑曹判書趙公行狀)에서 발췌하다

 

庚辰春又除掌令兼史職 경진춘우제장령겸사직

移校理尋遞 又拜副修撰 이교리심체 우배부수찬

時淸陰金文正公爲群小所誣 시청음금문정공위군소소무

公陳箚辨之 其略曰공진차변지 기략왈

掌令柳碩 人皆知爲姦慝 장령류석 인개지위간특

而畏惡咋舌 不敢開喙 이외악사설 불감개훼

獨金尙憲嚴辭斥絶 독금상헌엄사척절

坐此轗軒十有餘年 좌차감헌십유여년

稔毒藏鋒 顗覦釁隙 임독장봉 의유흔극

一朝見尙憲得罪於時議 일조견상헌득죄어시의

鼓吻閃舌 逞其宿憾 고문섬설 령기숙감

碩之眞形 至此畢露 석지진형 지차필로

其曰無非尙憲之人云者 卽范睢傾魏冉之說也 기왈무비상헌지인운자 즉범휴경위염지설야

其曰盤據威福十八年云者 卽漢臣傾霍氏之語也 기왈반거위복십팔년운자 즉한신경곽씨지어야

隱然擧今日朝廷 置之於不測之域 은연거금일조정 치지어불측지역

至於臣卽殿下之臣等語 此昏朝賊臣之遺響 지어신즉전하지신등어 차혼조적신지유향

其時聞者猶且驚心 不料此言又發於聖明之朝也 기시문자유차경심 불료차언우발어성명지조야

用是觸天怒 求外除南原府使 용시촉천노 구외제남원부사

未幾以疾罷歸 敍拜禮賓寺正 미기이질파귀 서배례빈시정

 

경진년(1640) 봄에 또다시 장령에 제수되고 사관의 직임을 겸하다가

교리로 옮겼다가 얼마 후 곧 교체되고 또다시 부수찬에 제수되었다

이때 청음 김 문정공(상헌)이 여러 뭇 소인배들에게 모함을 받은바

공이 간단한 상소문 차자를 올려 그것을 변론하였는데 그는 대략 이렇다

장령 류석이 간사하고 못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면서

그의 악함이 두려워서 혀를 깨물며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김상헌 혼자만이 엄한 말로 배척하고 끊으니

이것으로 인해 유석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벼슬길이 막힌 지 10여 년이 되었다

그는 독을 품고 칼날을 감추고서 조용히 틈을 넘보다가

하루아침에 김상헌이 시류의 논의에서 죄를 얻는 것을 보고는

입을 놀리고 혀를 내둘러 옛 감정을 풀어내니

류석의 진짜 참모습이 이에 이르러 모두 드러나게 되었다

그가 김상헌의 사람 아님이 없다고 말한 것은 바로 진나라 범수가 위염을 모함한 말이고

그가 위엄과 복을 18년 차지했다 라고 한 것은 바로 한나라 신하가 곽씨를 모함한 것이며

이는 은연중에 오늘날의 조정을 들어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두었다

신은 바로 전하의 신하라는 등의 말은 혼미한 광해조 때의 적신들이 남긴 소리이다

그때 들은 자도 오히려 마음으로 놀랐는데 이 말이 또 밝은 성상의 조정에서 나올 줄 몰랐다

공은 이로 인해 성상의 노여움을 저촉하고는 외직을 청하여 남원 부사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으며 순서대로 예빈시 정에 제수되었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중기의 문신 문충(文忠)공 약천 남구만(藥泉 南九萬1629~1711)선생이 약천 조계원선생의 아들 충헌(忠憲)공 만회 조사석(晩悔 趙師錫 1632~1693)선생과 교우하고 또 행장서문을 부탁받고 형조 판서 조공 행장(刑曹判書趙公行狀)을 찬하는 글로서 행장의 주인공 약천 조계원(藥泉 趙啓遠 1592~1670)선생은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자장(子長) 신흠(申欽)의 사위로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이며 광해군 8(1616) 진사시에 합격하고 인조반정 후 의금부도사가 되었고 인조 6(1628)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을 거쳐 형조좌랑이 되고 1631년 일시 파직 당하였다가 그 뒤 1636년 병자호란 때 유장(儒將)으로 천거되고 사헌부장령(司憲府將令) 옥당의 수찬(修撰) 교리(校理)를 거쳐 사간이 되었는데 이 때 김상헌(金尙憲)이 탄핵 당하자 이를 구원하는데 힘썼는데 위 발췌문 행장에 나오는 이야기와 같다 1641년 세자시강원보덕으로서 볼모로 심양(瀋陽)에 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청나라의 요구로 명나라의 진저우(錦州) 공격에 참가하게 되자 그를 시종 모래주머니를 이용하여 성을 쌓는 기계(奇計)를 써서 세자 일행이 무사히 돌아오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심양에서 돌아와 수원부사 홍청감사(洪淸監司) 동부승지 예조참의 강화유수 도승지 경상감사 등을 거쳤고 효종 5(1654)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경기감사 전라남도감사를 거쳐 1659년 함경감사 형조와 공조 참판 동지의금부사를 지냈으며 현종 3(1662) 형조판서에 이르러 사직하고 보령에 은퇴하여 한가한 여생을 보냈는데 그 뒤 조정으로부터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만년에 민전(民田)을 광점(廣占)하였다는 비판도 받았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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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게 틈을 넘보다라는 오늘의 성어 의유흔극(顗覦釁隙)은 좋은 의미로 쓰일 때는 점잖고 의젓하게 기회를 엿보다로 표현 할 수가 있는 반면에 발췌문과 같이 합당하지 않은 연유로 쓰일 때는 조용하게 넘보다 정도로 해석 할 수 있는 의()와 유()의 합성단어가 의유(顗覦)라는 말의 묘한 해석이 가능 한 것은 바로 한자가 내포하고 있는 뜻이 묘하기 때문일 것이다 의유흔극(顗覦釁隙) 즉 점잖게 틈을 넘보면서 쉬는 틈틈이 우리의 선현들이 남긴 문집에서 좋은 성어 중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성어를 찾아서 연관된 자료와 선현들을 소개하고 선현들이 품었던 선한 정신들을 계승하여 더 좋은 사회를 위해 작은 보탬이 된다면 이 보다 더 행복한 점잖게 틈을 엿보면서 틈틈이 집필할 수 있는 의유흔극(顗覦釁隙)이라면 이 보다 더 좋은 말이 어디 있으랴 성어문집에 담고 휘호로 기록에 남긴다

 

桓紀 9217912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