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소저악맹 消沮惡萌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0. 29. 10:59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소저악맹 消沮惡萌


사라질 소消 막을 저沮 악할 악惡 싹 맹萌

악한 마음이 싹 트는 것을 가로막아 꺾이게 하다

이 성어는 조선 후기 동계 정온(桐溪 鄭蘊1569~1641)선생의 문집 동계선생문집(桐溪先生文集) 권사(卷四)에 충의위윤공 묘지명(忠義衛尹公墓誌銘)에서 발췌하다

先塋在仁川地 弟劭居其下 선영재인천지 제소거기하
公以路遠不能隨時節躬奠掃爲恨 공이로원불능수시절궁전소위한 
常以秋夕往省無失期 상이추석왕성무실기 
年過六十 猶能自力 間歲而行者再三 년과륙십 유능자력 간세이행자재삼 
奉先之需 務爲豐潔 봉선지수 무위풍결 
釜鼎器皿 必躬莅滌濯焉 부정기명 필궁리척탁언 
與其弟友愛尤篤 여기제우애우독 
每相遇共被而臥 磨肌而戲 매상우공피이와 마기이희 
雅有志節 庭中植松 竹 梅 菊 아유지절 정중식송 죽 매 국 
扁其堂曰節友 日痛掃漑相對 편기당왈절우 일통소개상대 
涉獵書史 頗通古今 섭렵서사 파통고금 
臨事善剖決 與人語 림사선부결 여인어 
洞露心肝 無有隱情 동로심간 무유은정 
尤善敎誘人 見人非誤 우선교유인 견인비오
據理明倫 開導其善心 거리명륜 개도기선심
而消沮惡萌 人之感化者多 이소저악맹 인지감화자다

선영이 인천에 있어 아우 소가 그 아래에 거주하는데
공은 길이 멀어 시절마다 몸소 찾아 제사지내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언제나 추석이 되면 가서 성묘하고 시기를 놓치지 않았으며
60이 넘었지만 오히려 스스로 힘으로 격년에 두세 번은 다녔다 
선영에 봉헌할 제수는 풍성하고 깨끗한 것으로 마련하였고
가마솥이나 제기 제함은 반드시 몸소 손수 씻었다
그의 아우와는 우애가 더욱 돈독하고 도타워서 
매번 서로 만나면 이불을 함께 덮고 누워 자면서 살갗을 비비며 웃고 놀며 우애를 확인하였다
평소에 지조와 절개가 있어서 정원에는 소나무와 대나무 매화 국화를 심고 
그 당호를 절우라고 지었으며 날마다 깨끗하게 쓸고 물을 주고 서로 대했다 
학문과 역사를 섭렵하여 고금을 통달하였고 
일에 임하여서는 판결을 잘 하였고 사람과 더불어 말할 때는 
마음속을 시원하게 드러내어 숨기는 것이 없었으며 
더욱 남을 잘 꾀하여 가르쳐서 남의 잘 못된 점을 보면 
이치를 근거로 윤리를 밝히고 그의 선한 마음을 끌어내어 
악한 마음이 싹트는 것을 가로막아 꺾이게 하니 사람들 중에 감화를 받은 자가 많았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후기 동계 정온(桐溪 鄭蘊1569~1641)선생이 장인인 윤할(尹劼1534~1607)선생의 충의위 윤공 묘지명(忠義衛尹公墓誌銘)을 찬한 글에서 발췌하였는데 윤할선생에 대한 자료는 극히 미약하여 묘지명에 있는 내용을 간추려 보면 자는 자고(子固)이고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선생의 증조 여림(汝霖)은 판관을 지냈고 조 감(瑊)은 진용교위를 지냈으며 부는 안정(安鼎)은 감역을 지냈었으며 선생은 외모가 헌칠하고 사람됨이 활달하고 분명하며 남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집안 살림에는 법도가 있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여 가문이 정숙하였으며 정유년(1597 선조30) 왜란 때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라는 왕명에 선생만이 왕명을 지켜야 한다 비록 그것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지만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의리에 죽는 귀신이 될지라도 숲에 숨어 사는 삶은 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지만 성은 함락되고 선생은 아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몸을 모면 할 수 있었으며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하고 죽었었는데 선생이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성 밖으로 나가자 사람들이 묻기를 공이 성에 들어간 것은 무슨 의도이며 죽지 않은 것은 또 무슨 의리냐고 물으니 선생이 조정의 명령으로 성에 들어간 것은 의리 때문이고 주장(主將)이 먼저 흩어졌으니 나만 홀로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으며 더구나 살려고 해서 산 것도 아니다 라고  대답하니 질문한 자들이 더 이상 대응하지 않았다 또 성을 넘어 빠져나올 당시에 어떤 사람이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져서 다리에 중상을 입었는데 선생이 그에게 차고 있던 칼을 뽑아서 다친 부위를 찌르라고 신속하게 명하니 이에 피가 흐르자 그 사람은 즉시 일어나서 걸을 수 있었다하니 선생이 생각하는 능력이 대담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행동이 평소에 마음 씀씀이가 대부분 이런 것들이었다라고 선생에 대한 기록된 묘갈명을 보았을 때 대단하신 어르신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동계 정온(桐溪 鄭蘊1569~1641)선생은 본관이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선조 39년(1606)에 진사가 되고 광해군 2년(1610)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시강원겸설서 사간원정언을 역임하였으며 임해군옥사에 대해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하였으며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한 대단하신 선생은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공 이시다 선생에 대한 자료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악한 마음이 싹 트는 것을 가로막아 꺾이게 하다 라는 오늘의 성어 소저악맹(消沮惡萌)을 실천하는 것은 보통의 인물이 아닌 이상은 실현하기 어려운 말일 것이다라고 하면 대부분 뜨끔하게 여기면서도 슬그머니 자기는 아닌 척 회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악이란 마음에서 일어나는 한순간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일은 성인군자도 사실은 경계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라 필자는 그렇게 믿는다 그렇지만 소저악맹(消沮惡萌)을 할 수 있어야 만이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겠는가 성어문집에 담고 휘호하면서 늘 되새기며 바른 마음을 가지길 노력해야겠다

桓紀 9217년 9월 13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