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위미투타 委靡偸惰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1. 6. 11:58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위미투타 委靡偸惰


맡길 위委 쓰러질 미靡 훔칠 투偸 게으를 타惰

나약하여 남에게 의지하려하고 게을러서 남의 것을 넘보는 상태를 말한다

이 성어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백담 구봉령(栢潭 具鳳齡1526∼1586)선생의 시문집인 백담선생문집(栢潭先生文集) 권팔(卷八)에 안여지에게 보낸 편지(與安汝止書)에서 발췌하다

玄沙雲栖 尙未離否 현사운서 상미리부 
兒輩亦趨下塵否 아배역추하진부 
專賴庇誨 無廢厥業 전뢰비회 무폐궐업 
一家感德如何 일가감덕여하 
但大兒懶性已熟 단대아라성이숙 
於學未免有越視之歎 어학미면유월시지탄 
小兒稍似警悟 而亦無振勵之勇 소아초사경오 이역무진려지용 
委靡偸惰 以苟度歲月 위미투타 이구도세월
終不能進一步向前 此病陋之常所慨然者也 종불능진일보향전 차병루지상소개연자야 
切願別施鞭撻 使之知人有至貴至重之寄 절원별시편달 사지지인유지귀지중지기 
不可少恝之意 則幸矣 불가소괄지의 즉행의 
中兒本低拙自甘 只將爲飽暖之歸 중아본저졸자감 지장위포난지귀 
病人似續 大槪類此 尤增悵歎 병인사속 대개류차 우증창탄 
所以遙仰高明之指揮 不自偶爾也 소이요앙고명지지휘 부자우이야 
且退溪先生書尺 已傳寫以送否 차퇴계선생서척 이전사이송부 
前歲被命悤率 敢累左右 전세피명총솔 감루좌우
今思之 殊可愧悚耳 금사지 수가괴송이

아직 운서 현사사에서 떠나시지 않으셨는지요
아이들도 또한 선생님 곁에 있는지요
오로지 보듬어주고 가르쳐 주시는 덕분으로 학업을 폐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한집안이 큰 덕에 감사함을 어떻게 다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큰 아이는 너무 게으른 습성이 이미 익숙해져서 
공부에 대해 남의 일 쳐다보듯이 하니 이 탄식을 면할 수가 없답니다
작은 아이는 다소 재빠르게 깨닫는 것 같으나 또한 힘쓰고자 하는 의욕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나약하여 남에게 의지하려하고 게을러서 구차스럽게 세월만 허비하고 
끝내 한걸음도 제대로 나가지 못하니 이것이 병들고 노쇠한 이 사람이 항상 탄식하는 밥니다 
간절하게 바라오니 특별히 편달하시어 사람은 매우 귀중한 책임을 지고 있음을
조금도 여유를 부러서는 안 되는 뜻을 알게 해 주시면 즉 다행입니다
중간 애는 본래 졸렬하여 스스로 달게 여겨서 아마 따뜻이 배부른 삶이 되고 말 것 같습니다 
사람 속병을 섞이는 일이 대개 이런 종류이니 더더욱 슬프고 한스럽습니다 
멀리서 고명한 지도를 바라보는바 우연하게 절로 한 말이 아닙니다
퇴계 선생의 편지는 이미 베껴서 부치셨는지요 
지난해에 왕명으로 은총을 받고 경황이 없어서 감히 두루두루 누를 끼쳐서 
지금에 생각하니 매우 부끄럽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백담 구봉령(栢潭 具鳳齡1526∼1586)선생이 아들 셋을 안여지선생에게 잠시 훈육지도를 바라며 보내고 난후에 서로 간에 주고받은 서신 중에 보낸 편지(與安汝止書)의 내용이다

백담선생이 의뢰한 아이들의 선생인 안여지(安汝止)선생에 대해 자료를 찾으니 조선조에 3명의 동명이인이 있어 잘 못 하다간 다른 분을 소개 할 것 같기도 하고 또한 모두 간략한 정보만 검색되어 깊이 알 수가 없으며 마찬가지 발췌문의 선생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선생은 조선 중종(中宗) 때의 문신이고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자는 지지(止止)이고 중종17년(1522) 식년시 생원 3등(三等) 36위로 급제 한 후 중종 26년(1531) 식년시 병과에 급제하고 임억령(林億齡) 나세찬(羅世纘) 등과 교유하였으며 석천시집(石川詩集)과 송재유고(松齋遺稿)에 증시(贈詩) 송시(送詩)가 실려 있다는 정도의 정보만을 습득한 것뿐이라서 매우 안타깝다  

백담 구봉령(栢潭 具鳳齡1526∼1586)선생은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1세에 아버지마저 죽자 초상집례(初喪執禮)에서 어른을 능가해 마을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외종조 권팽로(權彭老)에게 소학을 배워 문리를 얻고 1545년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면서 명종 1년(154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 예문관검열 봉교를 거쳐 홍문관정자에 이르렀으며 1564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해 수찬 호조좌랑 병조좌랑을 거쳐 1567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정언 전적 이조좌랑 사성 집의(執義) 사간을 두루 거치고 직제학에 이어 동부승지 우부승지 대사성 전라관찰사 충청관찰사 등을 지내다가 1577년 대사간에 이듬 해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의 형조참의를 1581년 대사헌에 이듬 해 병조참판 형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한때 암행어사로 황해도 충청도 등지에 나가 흉년과 기황으로 어지럽던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으며 당시는 동서의 당쟁이 시작될 무렵이었으나 중립을 지키기에 힘썼으며 시문에 뛰어나 기대승과 비견되었고 또한 혼천의기(渾天儀記)를 짓는 등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만년에 정사(精舍)를 세워 후학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하였으며 죽은 뒤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되고 저서로는 백담문집(栢潭文集) 및 그 속집(續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나약하여 남에게 의지하려하고 게을러서 남의 것을 넘보는 상태를 말하는 오늘의 성어 위미투타(委靡偸惰)는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아니하고 놀고먹는 일만 즐긴다면 평범한 즐거움은 있겠지만 솔직히 사람으로 나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놓고 또 어렵게 극한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이겨내고 이뤄내는 그런 일을 하는 쾌감과 고도의 즐거움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절대로 위미투타(委靡偸惰)의 경지에는 가지말자하며 휘호하고 성어문집에 담아 놓는다

桓紀 9217년 9월 21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