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박람정기 博覽精記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2. 4. 14:31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박람정기 博覽精記


넓을 박博 볼 람覽 쓿은 쌀 정精 기록할 기記

두루 널리 보고 세밀하게 적고 외우다

이 성어는 조선 초기의 문신인 삼탄 이승소(三灘 李承召1422~1484)선생의 시문집 삼탄집(三灘集)에 삼탄행장(三灘行狀)에서 발췌하다

公之學 博覽精記 공지학 박람정기
自禮樂兵刑 陰陽律曆 자례악병형 음양률력 
醫藥地理及老佛家書 靡不貫通 의약지리급로불가서 미불관통 
公之文 本乎聖經 涵養旣馴 공지문 본호성경 함양기순 
故其溫醇淡潤 類玄文之玉 고기온순담윤 류현문지옥 
澤而無瑕 今人愛變 傳誦不休 택이무하 금인애변 전송불휴 
嘗奉使于燕 倪學士謙 상봉사우연 예학사겸 
贈之以詩云 증지이시운 
昔年奉使到東方 曾識儀刑在漢陽 석년봉사도동방 증식의형재한양 
每念贈行詩絶妙 幾回開卷墨猶香 매념증행시절묘 기회개권묵유향 
於此亦知公之薀蓄 而見稱於天下之士也如是 어차역지공지온축 이견칭어천하지사야여시 
凡國家典冊敎令 交隣事大之文 多出其手 범국가전책교령 교린사대지문 다출기수 
於呼 公生逢盛際 賁餙大平 어호 공생봉성제 분희대평 
嶷然領袖斯文 억연령수사문 
事業粲粲 昭於竹帛 사업찬찬 소어죽백
其傳於後世 固無疑也 기전어후세 고무의야 
因輯任官行事 爲書一通 附于家乘云 인집임관행사 위서일통 부우가승운

공의 학문은 두루 널리 보고 세밀하게 적고 외워서
이에 예악 병형 음양 율력 
의약 지리 노가나 불가의 서책에 이르기까지 관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의 글은 성스런 경서에 근본을 두고 함양하면서 잘 따랐다 
그러므로 따뜻하고 순후하며 담박한 윤택이 현묘한 무늬가 있는 옥과 같아서 
흠결이 없고 윤기가 흐르니 요즈음 사람들이 좋아하여 전하고 외우는 것이 그치지를 않았다
공이 일찍이 사명을 받들어 연경에 갔을 적에 명의 학사 예겸이 
시를 지어주었는데 시에 이르길
지난해에 사신이 되어 동방청구에 갔을 적에 이제 의형 한양 땅에 있는 줄을 알았는데 
늘 나에게 준 절묘한 행시가 생각나서 몇 차례를 펼쳐놓고 읽어도 먹 향기 풍긴다오 하였다
여기서 역시 공이 문장에 깊이가 깊어서 천하 선비의 칭송이 이와 같음을 알 수가 있다 
이에 국가의 모든 전책이나 교령 및 교린이나 사대의 문서가 거의 다 공의 손에서 나왔다
오호라 공은 살아서는 성대한 시대를 만나 태평의 아름다움을 장식하고 
높다랗게 사문의 영수가 되었으며
사업은 선명하고 찬란하여 죽백에 소상하니 
후대에 그것이 전해질 것은 진실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임명된 관직과 행한 일을 편집함으로 인해 글을 한 통 지어서 가승에 붙인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초기의 문신인 삼탄 이승소(三灘 李承召1422~1484)선생의 삼탄선생의 행장(三灘行狀)에서 발췌를 하였는데 아쉽게도 글쓴이는 미상이며 삼탄선생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양성이고 자는 윤보이고 증병조판서 온의 아들이며 세종 20년(1438) 17세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1447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을 배수받고 부교리 응교 장령이 되고 세조가 즉위하자 집현전 직제학으로서 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고 예문관응교를 거쳐 참의가 되어 초학자회언해본을 찬정하고 이어 형조 호조의 참의를 역임하고 1459년 사은사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이조참의 예문관제학과 사성을 겸하고 세조가 지은 병장설을 찬수하고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신병을 얻어 위중하자 국왕이 의약을 내렸으며 예종이 즉위하자 예조참판이 되어 명나라와의 외교 사무를 잘 처리하였으며 성종2년(1471) 순성좌리공신 4등에 책록되고 양성군으로 봉해지고 예조판서가 되어 지경연사로서 경연활동을 크게 일으키고 1475년에는 교육의 강화와 해불론을 제의하고 과거를 주관 인제등용에 힘썼으며 왜인 야인의 접대를 주관하였고 우참찬이 되고 1480년 이조  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신숙주 등과국조오례의를 편찬하였으며 480년 주문사의 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로로 노비 6구  지 40결을 받았으나 정사였던 한명회의 사헌궁각사건에 연루되어 간관으로부터 탄핵을 받은 후에 이조판서 형조판서 우참찬 좌참찬으로서 문명을 드날렸으나 1483년 신병이 심해져 사직을 상소하자 한직인 중추원의 지중추부사가 되어 녹봉을 특별히 급여를 받는 왕으로부터 총애를 받았으며 성품은 우연히 사물을 접하더라도 힘써 대체를 알고자 하였고 널리 독서하여 예 악 병 형 음양 율 역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특히 문장으로 이름을 남겼으며 청렴하여 집안을 장식함에 꾸민 것이 없었다고 하며 63세의 일기로 성종 15년에 별세하니 시호는 문간(文簡)공이시다 고종 8년에 창건하고 1934년에 중건한 사우가 있어 후손들에 의해 향사되고 있으며 선생의 저서로는 삼탄집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발췌문 행장에 선생은 풍채와 자태가 따뜻하고 순수하며 도량이 넓고 태도가 곧으며 수염이 매우 아름답고 말이 적고 관이나 사가에 거처할 때 어디서든 단정하고 엄숙하여 마치 보는 사람들이 신선과 같다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가까이 다가가서 만나보면 마치 봄바람처럼 편안하고 함께 오래도록 있으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주옥이 곁에 있으니 자기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라고 하는 것 같아져서 스스로 기가 꺾이고 뜻이 졸아들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라는 행장의 문장일부분만 보아도 선생의 성품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발췌문에 두루 널리 보고 세밀하게 적고 외우다라는 뜻의 오늘의 성어 박람정기(博覽精記)는 학습에 임하는 자든 일반인이든 늘 두루두루 널리 보고 관찰하고 익히고 외우고 또 기록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두면 그것이 곧 지식이요 보물인 것을 솔직히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다만 박람정기(博覽精記)를 실천하는 자세가 꾸준히 이루어져 이것이 마치 습관처럼 될 때 지식이 넘쳐 나리라 믿어보며 붓 들고 휘호하고 성어문집에 담는다

桓紀 9217년 10월 20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