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산요둔광 剷耀遁光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2. 8. 10:50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산요둔광 剷耀遁光


깍을 산剷 빛날 요耀 달아날 둔遁 빛 광光

뛰어난 재주를 감추고 영광스러움도 버리다

이 성어는 조선시대 문신 상촌 신흠(象村 申欽 1566~1628)선생의 시문집 상촌고(象村稿)권이십삼(卷二十三)묘지명(墓誌銘)에 진사이군묘지명(進士李君墓誌銘)에서 발췌하다

欽生也後 不獲覩君盛年 흠생야후 불획도군성년 
晩乃拜床下 君年已七袠 만내배상하 군년이칠질 
而齒髮不替 杖屨康寧 이치발불체 장구강녕 
其探討詩文 揚搉古今 기탐토시문 양각고금 
鑿鑿副名實 已又出而回眺洞壑 착착부명실 이우출이회조동학 
瞻顧雲煙 如入龍亭葛廬 첨고운연 여입룡정갈려 
殆卸駕忘返也 태사가망반야 
噫 雖君材與器 희 수군재여기 
沒世闇然竟無聞 爲可嘅 몰세암연경무문 위가개
抑剷耀遁光 約諸身以終其天年 억산요둔광 약제신이종기천년 
斯亦先民哉 銘曰 사역선민재 명왈 
嗟夫君兮 猶金在礦 차부군혜 유금재광 
猶玉在璞 不售其珍 유옥재박 불수기진 
存以大朴 鶴髮龜齡 존이대박 학발구령 
竹杖芒蹻 居貞用晦 죽장망교 거정용회 
寔道之極 我銘其窽 식도지극 아명기관
昧者是式 매자시식

저 신흠은 뒤에 태어나 군(선생을 극존칭)의 성년시절을 보지 못하였으며 
뒤늦게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뵈었는데 군의 나이가 이미 70세이셨으나 
치아와 모발이 변하지 않으셨고 어르신의 기력도 매우 강녕하셨으며 
시문을 탐독 토론하시며 고금의 역사를 드러내고 끌어내심에 있어 
조리에 맞게 명실상부하였다 또 밖으로 나가 계곡골짜기를 둘러보고 바라보며 
구름과 놀을 쳐다보시면서 마치 용정산과 갈려산에 들어가 
안장과 멍에를 풀어놓고 집에 돌아가기를 잊은 듯이 하셨다
아 군은 큰 그릇과 같은 기량과 재능을 가지고도 
세상이 끝날 즈음에도 암연히 알려지지 못한 것은 가히 개탄스럽다 하겠다
굽어보면 재주를 감추고 영광스러움도 버리고 몸가짐을 검소히 하여 천수를 누리니 
이 역시 선민이라 하겠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한다
아 군이시여 마치 광석 속에 묻힌 금인 듯 
옥돌 속에 있는 옥인 양 진귀함을 드러내지 아니하시고 
크나 큰 순박함으로 보존하셨으니 흰머리 장수한 연세시지만 
대지팡이와 짚신으로 지내시면서도 정절을 지키시고 드러내지 않으셨으니
참으로 이것이 도의 극치로다 선생의 무덤에 내가 명하나니 
어리석은 자는 이에 본 받으시라 

이 성어의 발췌문은 상촌 신흠(象村 申欽 1566~1628)선생이 선생의 스승인 이숭경(李崇慶1510~1588)선생의 묘지명을 찬한 글에서 발췌를 하였는데 이숭경선생은 조선 전기의 대선비로서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군선(君善) 호는 풍담도로(楓潭道老) 단구한민(丹丘閑民)이고 조부는 호조참판 이창신(李昌臣)이며 부친은 성균생원 이정(李頲)이고 모친은 대사헌을 지낸 국서(國瑞) 민상안(閔祥安)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향시(鄕試)에서 장원을 할 정도로 사장(詞章)에 능하였다고 하며 중종 35년(1540) 경자식년사마시(庚子式年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곧 과거의 뜻을 버리고 나와 양악산(陽岳山) 기슭에 부모의 묘소를 옮기고 그곳에서 기거를 정하고 일생을 보냈는데 선생은 시를 잘 지었으며 서예 초서에도 뛰어나고 사암(思庵) 박순(朴淳)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등과 같은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였으며 시문집으로 풍담유고(楓潭遺稿)가 있으며 선조 21년(1588) 10월 1일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그 이듬해 경기도 이천시(利川市) 부연리(釜淵里) 곤좌간향(坤坐艮向)에 묻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자료참조]

발췌문을 쓰신 상촌 신흠선생은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외 현헌(玄軒) 현옹(玄翁) 방옹(放翁)이고 증판서 신세경(申世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참찬 신영(申瑛)이고 아버지는 개성도사 신승서(申承緖)이다 어머니는 은진송씨로 송기수(宋麒壽)의 딸이다 송인수(宋麟壽)와 이제민(李濟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선조 18년(1585)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고 1586년 승사랑으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1583년에 외숙인 송응개(宋應漑)가 이이(李珥)를 비판하는 탄핵문을 보고 이이는 사림의 중망을 받는 인물이니 심하게 비난하는 것은 불가하다 라고 한 이 일로 당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으로부터 이이의 당여라 하여 배척을 받아 겨우 종9품직인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다 그 뒤 곧 경원훈도로 나갔으며 광주훈도를 거쳐 사재감참봉이 되었으며 그 후로 여러 관직을 거쳐 1623년(인조 즉위년) 3월 인조의 즉위와 함께 이조판서 겸 예문관 홍문관의 대제학에 중용되었으며 같은 해 7월에 우의정에 발탁되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하고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오른 후 죽었다 효종 2년(1651) 인조묘정에 배향되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에 제향되고 시호는 문정(文貞)공이시다 상촌집 야언(野言)등과 현헌선생화도시(玄軒先生和陶詩) 낙민루기(樂民樓記) 고려태사장절신공충렬비문(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碑文) 황화집령(皇華集令)등이 저서로 남아있다

뛰어난 재주를 감추고 영광스러움도 버리다 라는 의미인 오늘의 성어 산요둔광(剷耀遁光)의 주인공 이숭경선생의 묘비명과 기타자료를 찾아보니 선생은 진짜 선비 중에 선비였었음을 깨닫고 선생과 같이 조용히 세상을 꿰뚫어 보고 진정 민족과 나라를 위해 걱정하고 언행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 마음을 추스르며 산요둔광(剷耀遁光)을 문집에 담고 휘호로 남긴다

桓紀 9217년 10월 24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