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정백진려 精白振勵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2. 10. 11:12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정백진려 精白振勵

쓿은 쌀 정흰 백떨칠 진힘쓸 려

 

티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힘써 진작시키다

 

이 성어는 조선조 중후기의 문신인 한포재 이건명(寒圃齋 李健命1663~1722)선생의 시문집인 한포재집(寒圃齋集)권삼(卷三)에 경계를 아뢰는 상소(陳戒疏 丁丑應敎時)에서 발췌하다

 

方今上下恬嬉 百度解弛 방금상하념희 백도해이

當官者以目前爲計 守職者以濟私爲急 당관자이목전위계 수직자이제사위급

廟堂之所區畫 或歸於煩瑣 묘당지소구획 혹귀어번쇄

政令之所頒行 或失於顚倒 정령지소반행 혹실어전도

以至民志不固 法制不行 이지민지불고 법제불행

朱子所謂腹非巷議 輕侮朝廷者 可謂近之矣 주자소위복비항의 경모조정자 가위근지의

伏願殿下如天地之至大 不私於物 복원전하여천지지지대 불사어물

如四時之不差 立信于下 여사시지불차 립신우하

精白振勵 黜陟惟公 정백진려 출척유공

則令行禁止 將無往而不如意矣 칙령행금지 장무왕이불여의의

何謂弊政未祛也 我朝建國旣久 하위폐정미거야 아조건국기구

祖宗之良法美制 蕩盡無餘 조종지량법미제 탕진무여

叔季之痼弊巨蠧 紛然莫遏 숙계지고폐거두 분연막알

固不宜立談之頃 可盡其說 고불의립담지경 가진기설

而以其大者言之 如兵制之多門 이이기대자언지 여병제지다문

良役之偏苦 田政之不均 량역지편고 전정지불균

皆莫非悴民生而傷國本者也 개막비췌민생이상국본자야

自前爲國家深慮者 必欲變通 자전위국가심려자 필욕변통

而迄今未果 因循錯謬 莫可救正 이흘금미과 인순착류 막가구정

嗚呼 其終不可救耶 오호 기종불가구야

 

지금 위아래가 직무를 게을리하고 수많은 법도가 해이해져서

관직을 맡은 자는 눈앞의 꾀만 일삼고 직책을 지키는 자는 제 잇속만을 급선무로 삼으며

묘당에서 계획한 일들은 혹 번거롭다고 돌려보내고

정령을 반포하여 시행하여도 전도되어 없어지고

백성의 뜻은 견고하지 못하고 법제도는 시행되지 않는 데에 이르렀으니

주자의 말에 마음속에서 비방하고 길거리에서 의논하는 자는 조정을 업신여긴다 라고한 것이 이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오니 전하께서 지극히 큰 천지와 같이 물건을 사사롭게 다루지 마시고

어긋남이 없는 사시사철처럼 아래로 믿음을 확립하시고

티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힘써 진작시키고 내치고 등용함을 오직 공정하게

명령하여 행하고 금지하면 장차 가는 곳마다 뜻대로 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정사의 폐단을 제거하지 못하는 것은 왜이겠습니까 우리조선은 건국한 지 이미 오래되어

조종의 좋은 법과 아름다운 제도가 남김없이 모두 흩어 없어지고

몰락하는 시기의 고질적인 폐단과 커다란 좀들이 어지럽게 하여 막지 못하니

진실로 서서 이야기하는 잠깐 사이에 모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그 큰 것으로 말씀드리면 병영제도가 여러 문중 갈래로 많으며

양역이 한쪽으로 치우쳐서 괴롭고 전정이 고르지 못한 것은

모두 백성을 초췌하게 하여 국가의 근본을 해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전부터 국가를 위하여 깊이 생각하고 염려한 자들이 반드시 변통하고자 하였으나

지금에 이르도록 이루지 못하고 잘못된 것을 습관적으로 따르니 바로잡지 않을 수가 없사오니

오호라 결국 끝내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성어는 조선조 중후기의 문신인 한포재 이건명(寒圃齋 李健命1663~1722)선생이 숙종23(1697)에 임금에게 올린 경계를 아뢰는 상소문에서 발췌를 하였는데 구구절절 나라와 백성을 위한 걱정으로 가득한 한포재 이건명선생은 본관은 전주 자는 중강(仲剛)이고 이수록(李綏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이며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민서(李敏敍)이고 어머니는 정승 원두표(元斗杓)의 딸이다 숙종 10(168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6년 춘당대 문과에 을과로 급제 설서에 임명되고 수찬 교리 이조정랑 응교 사간을 역임하고 1698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우승지 대사간 이조참의 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1717년 종형 이이명(李頤命)이 숙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 문제로 숙종과 단독 면대했던 정유독대(丁酉獨對) 직후 특별히 우의정에 발탁되어 왕자 연잉군(영조)의 보호를 부탁받았으며 숙종상에 총호사로서 장례를 총괄하고 이어 경종 즉위 후 좌의정에 승진해 김창집 이이명 조태채 와 함께 노론의 영수로서 연잉군의 왕세자 책봉에 노력했으나 이로 인해 반대파인 소론의 미움을 받았다 경종 2년 노론이 모역한다는 목호룡의 고변으로 전라도 흥양의 뱀섬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앞서 주청사로 청나라에 가 있으면서 세자 책봉을 요청하는 명분으로 경종이 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위증(양기가 없어 여자를 가까이 하지 못하는 병)이 있다고 발설했다는 죄목으로 소론의 맹렬한 탄핵을 받아 유배지에서 목이 베여 안타까운 죽임을 당하였다 재상으로 있을 때 민생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특히 당시의 현안이던 양역(良役) 문제에 있어서 감필론과 결역전용책을 주장해 뒷날 영조 때의 균역법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시문에 능하고 송설체에 뛰어났으며 송시열을 학문과 정치의 모범으로 숭배하였으며 김창집 형제 및 민진원(閔鎭遠) 정호(鄭澔) 등과 친밀하였다 1725(영조 1) 노론 정권 하에서 신원되어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과천의 사충서원 흥덕의 동산서원 나주의 서하사에 제향되셨다 저서로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한포재집(寒圃齋集) 10권이 전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티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힘써 진작시키다 라는 의미인 오늘의 성어 정백진려(精白振勵)는 한포재선생님 같으신 맑고 깨끗하신 분에게서 나온 성어라 더 귀하고 아름답다 선생께서 오로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 정백진려(精白振勵)하는 자세로 모든 일에 임하길 노력하며 붓 들고 휘호하고 성어문집 백운필담에 담는다

 

桓紀 92171026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