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천방지락 天放之樂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2. 14. 11:05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천방지락 天放之樂


하늘 천天 놓을 방放 갈 지之 즐거울 락樂

하늘의 이치에 맡겨진 자연그대로의 즐거움

이 성어는 조선 정조 때의 학자인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1711~1781)선생의 시문집 대산집(大山集)권칠(卷七)서(書)에 황이직 후간께 답함 기축년(영조45) (答黃爾直 後榦 己丑)에서 발췌하다

象靖質鈍材朽 無所短長 상정질둔재후 무소단장
重以喪亂熏爍 苶然無以自振 중이상란훈삭 날연무이자진 
朋友相知 固已不復齒數於人人 붕우상지 고이불부치수어인인 
而執事誤聽道塗 遠問死生 이집사오청도도 원문사생 
則已幸矣 而辭旨勤縟 즉이행의 이사지근욕 
意寄深遠 非所以施於不肖之身也 의기심원 비소이시어불초지신야 
象靖蓋嘗應擧覓官 상정개상응거멱관 
奔趨於聲利之途 竟以不才 분추어성리지도 경이불재 
無以自見於世 무이자견어세 
非有高見遠識 可以藉手 而自樂者 비유고견원식 가이자수 이자악자 
而執事乃以東岡之陂 이집사내이동강지피 
天放之樂見擬 則固已過矣 천방지악견의 칙고이과의 
至於承遺緖 牖後學之云 지어승유서 유후학지운 
則尤非區區所敢聞者 즉우비구구소감문자 
未知何人者 不惜牙頰 而欺執事之聽也 미지하인자 불석아협 이기집사지청야

저 상정은 자질이 둔하고 재능이 쇠하여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거듭 사람이 죽는 재앙에 애를 태우느라 나른해져 스스로 진작할 수 없어서
붕우들은 서로 알고 지내면서도 진실로 이미 다시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언급도 없습니다
그런데 집사께서는 길에서 전하는 말을 잘못 들으시고 멀리 생사의 안부까지 물어주시니 
이미 다행입니다만 편지의 말씀이 은근하고 성대하여
담긴 뜻이 심원하시니 이는 저의 어리석은 몸에다 베푸실 것이 아닙니다
저 상정은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을 구하여 
명성과 이욕의 길에 분주히 내쫓았으나 마침내 재주가 없어서 
세상에 스스로 드러내지를 못하였습니다
높고 원대한 식견이 있는 사람이 아니며 가히 손을 빌러 사는 입장에 스스로 즐거워하는 자니
집사께서는 이에 벼슬에 나가지 않고 물러나 있는 곳에
자연에 맡겨두는 천방의 즐거움을 헤아리려 하시니 진실로 지나치십니다
남긴 실마리를 계승하고 후학들을 바라지해야 한다 라는 말씀에 이러르니
더욱 제가 감히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어떤 사람이 입안에서 나오는 말을 아끼지 않아 집사의 듣는 귀를 속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성어는 조선 정조 때의 학자인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1711~1781)선생이 이봉 황후간(夷峰 黃後幹1700~1773)선생과 나눈 편지글에서 답한 답글(答黃爾直 後榦 己丑 1769 영조45)에서 발췌하였는데 이봉 황후간선생은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이직(而直) 호는 이봉(夷峰) 아버지는 황도익(黃道翼)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시혁(朴時赫)의 딸이며 이재(李裁) 김성탁(金聖鐸)의 문인이고 어려서는 가정에서 효경(孝經)과 소학을 배웠고 자라서는 이재를 사사하여 대학 맹자 등을 배웠으며 이재가 죽자 다시 김성탁을 사사하고 광양의 적소를 찾아가 많은 것을 배우고 이 후 과거를 포기하고 주자서 퇴계집 춘추등 경전 연구에 전력하였으며 김성탁이 죽자 두 선생에게서 배우고 질문했던 것을 모아 종사록을 만들었으며 유승현(柳升鉉) 권좌만(權左萬) 김상정(金尙靖) 등과 교유(交遊)했으며 후진 양성에 힘쓴 선비 중에 선비이시다 사후 도암서원에 봉향되셨으며 저서로는 이봉문집(夷峰文集) 3책이 있다 발췌문의 저자 대산 이상정선생은 안동 출신 본관은 한산이고 자는 경문(景文)이며 호는 대산(大山)이고 아버지는 이태화(李泰和)이며 어머니는 재령 이씨(載寧李氏)로 이현일(李玄逸)의 손녀이며 이재(李栽)의 딸이고 영조 11년(1735)에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가주서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한 후 1739년 연원찰방에 임명되었으나 이듬 해 9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대산서당을 짓고 제자 교육과 학문 연구에 힘썼으며 1753년 연일현감이 되어 민폐를 제거하고 교육을 진흥하는 데 진력하다가 2년 2개월 만에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그대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고신(직첩의 별칭)을 박탈당하였으며 그 이후로는 오직 학문에만 힘을 쏟아 사우들과 강론하고 제자를 교육하는 데 전념하였으며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병조참지 예조참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셨다 그 후론 선생은 오로지 후학과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저서 및 편저로는 사례상변통고(四禮常變通攷) 약중편(約中編) 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 심동정도(心動靜圖) 이기휘편(理氣彙編) 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 심무출입설(心無出入說) 주자어절요(朱子語節要) 밀암선생연보(密庵先生年譜) 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 연평답문속록(延平答問續錄)등을 남기셨으며 사후 고종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고산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공이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하늘의 이치에 맡겨진 자연그대로의 즐거움이란 뜻의 오늘의 성어 천방지락(天放之樂)의 천방(天放)은 한자로만 해석을 하여보니 이해가 가질 않아 자료를 찾던 중 장자 마제(莊子 馬蹄)편에 천방에 대한 설명을 보니 吾意善治天下者不然 彼民有常性 織而衣 耕而食 是謂同德 一而不黨 命曰天放(오의선치천하자불연 피민유상성 직이의 경이식 시위동덕 일이부당 명왈천방)
나의 뜻은 천하를 잘 다스리는 자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저 백성들은 항상 본성이 있어서 길쌈을 하여 베를 짜서 옷을 지어 입고 논밭 갈아 농사를 지어 먹는 것을 해결하는데 이것을 일러 다 같이 얻은 타고난 덕이라 하며 모두 하나이지만 서로 무리지어 짜고 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것을 하늘이 놓아준 하늘의 이치에 맡겨진 자연그대로인 것이라고 말한다라고 하는 것을 읽고 보니 한자란 글자 한 자 한자의 뜻도 매우 중요하지만 많은 서책을 읽고 그 쓰임의 유래도 알아야 이해가 빨리되는 학문이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만 천방지락(天放之樂)은 즐거움 중에 가장아름다운 즐거움은 분명하리라 믿으며 성어문집에 담고 휘호로 남긴다

桓紀 9217년 10월 30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