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와왕상장 訛枉相長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2. 17. 09:17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와왕상장 訛枉相長


그릇될 와訛 굽을 왕枉 서로 상相 길 장長

거짓과 그릇됨이 서로 자라다

이 성어는 조선시대 야사 일화 소화 만록 수필 등을 모아 엮은 종합 야사집인 대동야승 기묘록별집(己卯錄別集)에 제현봉사(諸賢封事) 정축년(1517)에 눌재와 충암이 폐비 신씨의 복위를 청함 충암씀(丁丑訥齋冲庵請復廢妃愼氏 冲庵製)에서 발췌하다

嗚呼朝廷之上好惡不白 오호조정지상호악불백 
邪正路雜 是非或淆 사정로잡 시비혹효 
公私相欺 君子而未必居上位 공사상기 군자이미필거상위 
小人而未必在下列 소인이미필재하렬 
是以士無定志 習無定向 시이사무정지 습무정향 
隊分類集 東背西馳 대분류집 동배서치 
或以意氣 或以勢利 혹이의기 혹이세리
或以杯酒 或以雜駁 혹이배주 혹이잡박 
而指經術爲誕迂 笑忠信爲緣飾 이지경술위탄우 소충신위연식 
學明而內忌 行修而心非 학명이내기 행수이심비 
故爲曠達之行 暗構專己之欲 고위광달지행 암구전기지욕 
其間或有陰懷異心 言不盡忠 기간혹유음회이심 언불진충 
藏機而相勢 장기이상세
或有言巧而色令 혹유언교이색령
周旋彼此 扇動猜貳者 주선피차 선동시이자 
士習如此 訛枉相長 사습여차 와왕상장 
國事日頹 良可殞心 국사일퇴 량가운심 

오호라 조정에 일은 좋고 나쁨이 명백하지 아니하며 
간사하거나 정직함이 서로 엉켜있고 옳고 그름이 혹 뒤섞여 있으며 
공적이든 사적이든 서로 속이고 군자는 높은 벼슬에는 반드시 있지 아니하고 
소인은 낮은 반열에는 반드시 있지 아니합니다
이러하니 선비는 정해진 뜻이 없고 생활풍습은 일정한 방향이 없어서
무리들이 나눠지고 떼로 모여 동쪽을 배반하면 서쪽으로 쫒아가고
혹은 의기로써 혹은 권세로써
혹은 술잔으로 혹은 잡다하게 섞인 대로 떼를 지어 모여들고 
경서와 학문이 있는 사람들은 헷갈리게 속이는 사람으로 지목하고 충신을 가식한다고 비웃고 
학문이 밝은 사람을 꺼려하고 점잖고 바른 품성과 행실을 닦는 것을 그르게 여기고 
드러내놓고 활달한 행동을 하면서 남모르게 뒤로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욕심을 구상합니다 
그 사이에 혹은 몰래 다른 마음을 품어 말은 해도 충심을 다하지 않고 
기미를 감추고 서로 기회를 엿보며 
혹은 교묘한 말과 상냥한 얼굴로 
이쪽저쪽 오가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힘쓰면서 선동하고 시기하며 두마음을 품은 자
사대부의 습성이 이와 같으므로 거짓과 그릇된 일들만 자라나고 
나라 일은 날로 쇠하여지니 참으로 서글픈 일입니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시대 야사 일화 소화 만록 수필 등을 모아 엮은 종합 야사집인 대동야승 기묘록별집(己卯錄別集)에 제현봉사 정축년(1517)에 눌재와 충암이 폐비 신씨의 복위를 청하는 글에서 발췌하였는데 충암 김정(冲庵 金淨1486~1521)선생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외 고봉(孤峯)이며 보은 출신 아버지는 호조정랑 김효정(金孝貞)이며 어머니는 김해허씨로 판관 허윤공(許允恭)의 딸이며 1507년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에 보임되고 수찬 병조좌랑을 거쳐 정언으로 이어 병조정랑 부교리 헌납 교리 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되었을 때 왕의 구언정치에 응해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중종 때 억울하게 폐출된 왕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고 아울러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을 때 영의정 유순(柳洵) 등은 이에 반대했고 조광조(趙光祖)도 치죄를 주장한 대간의 파직을 주청하였는데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대간 사이에도 대립이 생겼으며 둘 다 옳다는 설까지 제기되어 1516년 석방되어 박상과 함께 다시 홍문관에 들어가고 권민수와 이행의 파직으로 마무리되었으나 그 뒤 응교 전한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뒤에 사예 부제학 동부승지 좌승지 이조참판 도승지 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그 뒤 기묘사화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되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으며 그 뒤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인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되었으며 인종 1년(1545) 복관되었고 인조 24년(1646)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선생은 일찍 3세에 할머니 황씨에게 수학하기 시작했고 20세 이후에는 최수성(崔壽峸) 구수복(具壽福) 등과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관료 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에 대한 학문 정진하였으며 시문에도 능했으며 새 짐승 등의 그림도 우면서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존재로서 그들의 세력 기반을 굳히기 위해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적극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 정치를 폈는데 그 일환으로 미신 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 등을 추진하였으며 제자로는 김봉상(金鳳祥) 김고(金顧) 최여주(崔汝舟) 외에 조카인 김천부(金天富) 김천우(金天宇) 등이 있으며 보은의 상현서원 청주의 신항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금산의 성곡서원등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충암집(冲菴集)이 있는데 여기에 실린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은 기묘사화로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견문한 제주도의 풍토기이다 시호는 처음에는 문정(文貞)이고 나중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거짓과 그릇됨이 서로 자라다라는 의미의 오늘의 성어 와왕상장(訛枉相長)을 보면서 오늘날 정치현실이 저마다 국민을 팔아 국민을 현혹하는 괴짜들이 활개치는 와왕상장세상을 경험하면서 선생의 아픔이나 필자의 타는 가슴이나 서글픈 것은 매한가지이리라 믿으며 와왕상장(訛枉相長)세상이 아닌 홍익상장(弘益相長)세상을 바라면서 백운필담에 담고 휘호로 남긴다 

桓紀 9217년 11월 3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