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성수죽백 聲垂竹帛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2. 15. 17:14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성수죽백 聲垂竹帛


소리 성聲 드리울 수垂 대 죽竹 비단 백帛

명성이 죽백(竹帛)에 전하다 즉 명성이 역사책에 전하다 

이 성어는 조선 초의 학자 양촌 권근(陽村 權近 1352~1409)선생의 시문집인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권십팔(卷十八)서류(序類)에 좌정승 이공 거이를 축하하는 연구의 서(賀左政丞李公 居易 聯句序)에서 발췌하다

惟公先世 國公基之 文貞承之 유공선세 국공기지 문정승지 
歷數百年 世濟其美 력수백년 세제기미 
公早以淸高雅量 不慕官達 공조이청고아량 불모관달 
一琴一鶴 遊心閑遠 일금일학 유심한원 
超然有安石東山之趣 초연유안석동산지취 
而人固以公輔期之 이인고이공보기지 
及値盛朝開國之初 遇知太上 급치성조개국지초 우지태상 
遂蒙拔擢 聯姻王室 榮耀旣融 수몽발탁 련인왕실 영요기융 
寅緣獲事我殿下于潛邸 인연획사아전하우잠저
乃與上黨協心同力 弼成定社之功 내여상당협심동력 필성정사지공 
嘉謨讜論 多所裨益 가모당론 다소비익 
殿下甞有倚任之意 故當初政 卽用爲相 전하상유의임지의 고당초정 즉용위상 
擇任之專 可謂重矣 택임지전 가위중의 
吁 君臣相遇自古爲難 우 군신상우자고위난
今公幸遇英明之主 以蒙委任之重 금공행우영명지주 이몽위임지중 
此正可以有爲之時也 차정가이유위지시야 
公宜益勉 開誠心布公道 공의익면 개성심포공도
光輔王猷 底綏民生 광보왕유 저수민생 
聲垂竹帛 慶流無窮 성수죽백 경류무궁 
曁萬子孫 與國咸休 기만자손 여국함휴 
則一品之官 千鍾之祿 豈特榮一時哉 즉일품지관 천종지록 기특영일시재
當世世相承而未艾也 당세세상승이미애야

생각건대 공의 선대에 국공이 터전을 닦고 문정이 그 대를 계승하고
수백 년 역사가 흐르면서 세세대대로 미덕을 가지런히 하였는데 
공은 일찍부터 깨끗하고 높은 뜻을 지녀 깊고 너그러운 마음씨로 벼슬영화를 구하지 않고 
일금일학이 전 재산이라 즉 첨렴결백하여 마음이 여유롭고 우아하며 원대하니 
초연히 시골에 은거하며 편안히 지내는 안석 동산의 다다르려는 마음을 가졌으므로 
사람들은 진실로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을 건질 공보로 기대하였다
성조가 개국할 초창기에 태조태상이 그 인격을 알아 대우하였으니 
드디어 발탁의 은총을 입고 왕실과 혼인의 연을 맺고 그 존경과 칭찬이 이미 가득하였다 
이 인연으로 우리 태종전하를 세자의 사저 잠저에서 섬기게 되어  
공의 아들 상당과 더불어 마음과 힘을 함께 모아 전하를 도와 정사의 공로를 이루어내었으니 
그의 좋고 아름다운 의견과 바른 의논에 도움이 한층 더 많았으며
전하는 일찍이 위임할 뜻이 있어 첫 정사에 마땅히 곧 등용하여 정승을 삼았으니
가려서 임명하는 것은 오직 가히 매우 중하다 할 수 있다
아 군신이 서로 잘 만나기가 예로부터 어려운 일인데 
지금 공은 다행하게도 영명한 주인 임금을 만나 위임의 중대함을 은총을 받았으니
이는 참으로 일을 바르게 해볼 수 있는 시기이다 
공은 마땅히 더욱 힘을 써서 성심을 다하여 공도를 펴고 
왕이 꾀하는 일을 도와 빛내고 민생을 밑에서부터 편안하게하고
명성이 역사에 전하고 경사가 끝이 없이 흘러서 
후세 많은 자손에게 이르도록 나라와 그 편안한 삶을 같이하면
일품의 벼슬과 가장 높은 벼슬이 받는 천종의 녹이 어찌 한 시대에만 빛날 뿐이겠는가 
당연히 세세대대 서로 이어져 영원히 빛나리라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초의 학자 양촌 권근(陽村 權近 1352~1409)선생이 좌정승 청허자 이거이(淸虛子 李居易1348~1412)선생을 축하하는 글에서 발췌하였는데 청허자선생은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낙천(樂天) 호는 청허자 외 평장사(平章事)이고  이공승(李公升)의 6대손이며 조선 왕조가 건국된 뒤 태조 2년(1393)에 우산기상시에 임명되고 그 뒤 평안도병마도절제사 참지문하부사 참찬문하부사 판한성부사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는데 선생의 출세는 왕자의 난 이후 태종이 집권한 이후부터였으며 왕자의 난 직후에 책봉된 정사공신에 올랐으며 또한 태종이 즉위한 직후에는 좌명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사실 선생은 조선 왕조의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선생의 아들 이저(李佇)는 태조 이성계의 장녀 경신공주와 혼인하였으며 또 다른 아들 이백강(李伯剛)은 태종의 장녀 정순공주와 혼인하였으니 이러한 특수한 관계가 조선 왕조 건국 이후에도 선생의 정치적 진출을 쉽게 하였으며 나아가 태종의 집권 이후에도 선생이 공신이었으나 정종이 재위할 때 시행된 사병혁파 조처에 대하여 크게 불만을 토로한 것이 연유가 되어 한때 계림부윤으로 좌천되었지만 이 후 태종 2년(1402) 좌명공신이 되고 또한 영사평부사로 승진되었으며 이 후에 다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복직되어서는 우정승을 거쳐 영의정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시호는 문도(文度)공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명성이 죽백(竹帛)에 전하다 즉 명성이 역사책에 전하다 라는 의미인 오늘의 성어 성수죽백(聲垂竹帛)의 죽백(竹帛)은 예전에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대나무를 넙적하게 깎아서 글씨를 쓰기 좋게 만든 죽간(竹簡)과 또는 비단(帛)에 기록을 남겨 놓은 것이 곧 종이가 발명되고 종이에 기록한 것과 같은 책이라는 의미가 되어 흘러간 역사가 됨으로서 역사책이라는 의미가 성립 됨으로 역사책에 이름이 찬란히 빛난다면 사람이 태어나 제대로 할 일을 한 것이기에 필자 또한 같은 값이면 사람에게 필요한 선한 일로 이름과 명성을 남기기를 바라면서 성수죽백(聲垂竹帛)을 오늘의 성어로 취하여 백운필담에 담고 휘호로 남긴다

桓紀 9217년 11월 1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