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계고경방 稽古經邦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2. 12. 10:59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계고경방 稽古經邦


머무를 계稽 옛 고古 날 경經 나라 방邦

옛것을 상고하여 나라를 다스리다

이 성어는 조선전기 문신 학자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 1342~1398)선생의 시문집인 삼봉집(三峯集)권칠(卷七)봉화정도전저(奉化鄭道傳著)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상(上)에 예전 총서(禮典 總序)에서 발췌하다

恭惟主上殿下 上以應乎天 下以順乎人 공유주상전하 상이응호천 하이순호인 
作其卽位 稽古經邦 작기즉위 계고경방 
庶事萬類 以序以和 서사만류 이서이화 
禮樂之興 惟其時矣 례악지흥 유기시의 
臣以爲禮之爲說雖多 신이위례지위설수다 
其實不過曰序而已 기실불과왈서이이 
朝廷主嚴 君尊而臣卑 조정주엄 군존이신비 
君令而臣行 故朝覲會同 군령이신행 고조근회동 
正大位而統百官 朝廷之序也 정대위이통백관 조정지서야 
祭享主誠 人盡其誠 神格於上 제향주성 인진기성 신격어상 
故蒸嘗祼獻 事祖考而通神明 고증상관헌 사조고이통신명 
祭享之序也 제향지서야 
宴享主和 賓獻而主酬 연향주화 빈헌이주수 
主侑而賓食 飮食宴樂 주유이빈식 음식연악
以睦宗戚而親臣隣 宴享之序也 이목종척이친신린 연향지서야

삼가 생각건대 주상 전하는 위로는 하늘에 호응하고 아래로는 인민에 순응하여 
왕위에 오르신 뒤에 옛것을 상고하여 나라를 다스리시니 
거의 모든 사물이 질서를 찾아서 조화롭게 되었으며
예악을 진흥시킬 시기라 생각합니다
신은 예를 위해 예에 관한 설이 많지만 
그 진실은 질서라고 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조정은 주로 엄해야 하므로 인군은 높고 신하는 낮은 것이며 
인군은 명령하고 신하는 그를 시행하며 고로 신하가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뵙고 회동을 하여 
큰 직위를 바르게 하고 백관을 통솔하는 것 이것이 조정의 질서입니다
제사는 주로 정성으로 하기 때문에 사람이 정성을 다하면 신이 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겨울 가을제사에 강신과 술잔을 올려 조상을 섬겨 신명을 통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제향의 질서입니다
연향은 주로 화합하는 것이므로 빈객이 올리면 주인은 이에 응수하고
주인이 권하면 빈객은 먹고 음식을 먹으면서 즐기며 
종척과 화목하고 신하와 이웃은 친해지므로 이것이 연향의 질서입니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전기 문신 학자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 1342~1398)선생의 시문집인 삼봉집 봉화정도전저 조선경국전 상에 예전 총서(禮典 總序)에서 발췌하였는데 삼봉 정도전선생은 아버지와 이곡(李穀)의 교우관계가 인연이 되어 이곡의 아들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박의중(朴宜中) 이숭인(李崇仁) 이존오(李存吾)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윤소종(尹紹宗) 등과 교유했으며 문장이 왕양혼후(汪洋渾厚)해 동료 사우의 추양을 받았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동 진사시에 합격해 충주사록 전교주부 통례문지후를 역임하였으며 1370년 성균관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으며 이듬 해 태상박사에 임명되고 5년간 전선(인사행정)을 관장하였고 1375년(우왕 1) 권신 이인임(李仁任) 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정책에 반대해 북원(北元)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 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會津縣) 관하의 거평부곡에 유배되었으며 1377년에 풀려나서 4년간 고향에 있다가 삼각산(三角山) 밑에 초려(三峰齋)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향인(鄕人) 재상이 서재를 철거하는 바람에 부평으로 이사하였으나 그곳에서도 왕모(王某)라는 재상이 별업을 만들기 위해 재옥(齋屋)을 철거하자 다시 김포로 이사하여 1383년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배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를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그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1384년 전교부령으로서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음 해 성균좨주 지제교 남양부사를 역임하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으며 1388년 6월에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해 조준(趙浚)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해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선생은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武)를 겸비하고 성격이 호방해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으며 천자(天資)가 총민해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군서(群書)를 박람해 의론이 정연했다 한다 조선개국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한(漢)나라 장량(張良)에 비유하면서 한고조(劉邦)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했다고 하면서 실질적인 개국의 주역은 자신이라고 믿었으며 그는 아버지로부터 노약노비 약간 명을 상속받았을 뿐 오랫동안 유배 유랑 생활을 보내면서 곤궁에 시달렸으니 더욱이 부계혈통은 향리(鄕吏)의 후예로서 아버지 때에 이르러 비로소 중앙 관료의 벼슬다운 벼슬을 했으며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연안 차씨(延安車氏)공윤(公胤)의 외예얼속(外裔孽屬)이었는데 특히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는 이유로 이유로 이러한 혈통 때문에 구가세족이나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자들로부터 백안시 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조선건국사업을 함께 한 조영규(趙英珪) 함부림(咸傅霖) 등 개국공신과 중신 하륜(河崙)등도 역시 연안 차씨의 외손얼손이라 이들이 신분적 하자를 극복하기위해서도 조선 개국에는 더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옛것을 상고하여 나라를 다스리다 라는 의미인 오늘의 성어 계고경방(稽古經邦)은 위정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반인들도 늘 옛것을 잘 상고하여 버릴 것과 취할 것을 가려서 국가와 사회와 가정을 다스려 나가는 밑바탕으로 삼으면 세상은 더 온화하리라 믿으며 계고경방(稽古經邦)을 휘호하고 성어문집 백운필담에 담는다 

桓紀 9217년 10월 28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