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청신아건 淸新雅健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2. 18. 09:44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청신아건 淸新雅健


맑을 청淸 새 신新 초아 아雅 튼튼할 건健 

산뜻하게 새롭고 우아하며 힘차다

이 성어는 조선 중기의 문신 경정 이민성(敬亭 李民成 1570~1629)선생의 시문집 경정선생집년보(敬亭先生集年譜)권이(卷二)부록(附錄)에 광명병서 장현광(壙銘幷序 張顯光)에서 발췌하다

公之季前郡守民寏 來謂顯光曰 공지계전군수민환 래위현광왈 
葬兄之日 不及致銘于壙 장형지일 불급치명우광 
故敢以請焉 顯光亦嘗有知許之分 고감이청언 현광역상유지허지분 
不敢牢辭 遂奉閱其行狀 則大槩如右 불감뢰사 수봉열기행상 즉대개여우 
公以英特之姿 加文學之博 공이영특지자 가문학지박 
通遍古籍 該貫無遺 통편고적 해관무유 
留意世務 儘有商量 可謂適用之才也 류의세무 진유상량 가위적용지재야 
知公者皆望其大有展布矣 지공자 개망기대유전포의 
而公於勢利所在 謙退遜避 이공어세리소재 겸퇴손피 
若將浼焉 故進寸退尺 약장매언 고진촌퇴척 
前後出入臺閣 黽勉而行 전후출입대각 민면이행 
旋卽退歸 是以未嘗淹三年在朝 선즉퇴귀 시이미상엄삼년재조 
唯以杜門宴居 看書吟詩爲事 유이두문연거 간서음시위사 
平生著述 無慮累千篇 평생저술 무려루천편 
淸新雅健 有古作者風 청신아건 유고작자풍 
今收拾無所失墜 圖所以傳之也 금수습무소실추 도소이전지야 
然文章特其餘事耳 公之孝友 乃其所立本也 연문장특기여사이 공지효우 내기소립본야
而行己也端 發言也和 이행기야단 발언야화 
處事也審 接人也寬 此皆實德也 처사야심 접인야관 차개실덕야 

지난해 가을에 공의 아우 군수 민환이 찾아와서 나 현광에게 말하기를 
형을 장례한 날에 무덤 속에 광명을 쓰지 못해 넣어 드리지 못하여서
그리하여 감히 글을 청한다고 하니 나 현광 역시 일찍이 공을 알고 함께한 친분이 있어 
감히 굳게 사양하지 못하고 드디어 행장을 받들어 펼쳐보니 대개 오른쪽과 같다
공은 영특한 자질로써 문학을 널리 공부하여 
옛날 전적을 두루 섭렵 통찰하여 그것을 남김없이 꿰뚫었으며
세상의 일에 힘쓰고 마음에 두어 모두 다 잘 헤아리시고 가히 쓰임에 적합한 재주라고 이른다
공을 아는 자들은 모두 크게 뜻을 펼치기를 바랐었는데 
공은 세력과 이익이 있는 곳에는 공손히 물러나고 겸손하게 피하시며
장차 몸을 더럽힐까봐 걱정하시면서 그러니 한 치를 나아가면 또 한 자를 물러나니 
전후에 걸쳐 조정 대각에 출입할 때에 부지런히 힘쓰고 행하길
나갔다가 곧바로 물러나 돌아오곤 하여 이는 일찍이 3년 동안 조정에 머문 적이 없었으며 
오직 문을 닫고 즐거이 거처하며 책을 보고 시를 읊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평생에 저술한 것이 무려 수천 편이 쌓였는데
문장이 산뜻하게 새롭고 우아하며 힘이 있어 옛날 작자들의 기풍이 서려있으며 
지금 모두 수습하여 실추한 곳이 없으니 후세에 전할 바를 꾀하나
그러나 문장은 다만 남은 일일 뿐이며 공의 효도와 우애가 이에 근본을 세운 바이니 
몸을 행함에는 단정히 하고 말을 할 때는 조화롭게 하고 
일을 처리함에는 자세히 살피고 사람을 대할 때는 너그럽고 이는 모두 실로 덕이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중기의 문신 경정 이민성(敬亭 李民成 1570~1629)선생의 무덤 관속에 넣는 글 광명(장현광 찬)에서 발췌하였는데 경정선생은 경상북도 의성 출신으로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관보(寬甫) 아버지는 관찰사 이광준(李光俊)이며 어머니는 평산 신씨로 인의(引儀) 신권(申權)의 딸이며 선조 30년(1597)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정자에 임명되고 1601년 승정원주서를 거쳐 이듬 해 시강원설서에 제수되고 사서로 승진되었으며 서장관으로 차출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603년 예조좌랑을 거쳐 병조좌랑에 전임되고 이어서 병조정랑으로 승진되었으며 1605년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으나 정인홍일당의 반대로 제주점마어사가 되었으며 그 뒤 얼마간 일을 보다가 시사의 동향이 심상치 않아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는데 1608년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며 문학으로 옮겨 사가독서 후 이듬 해 옥당에 선출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여묘 3년을 마치고 홍문관수찬에 다시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교리 세자시강원 겸 문학 등을 역임하고 광해군 9년(1617) 정조(鄭造) 윤인등이 폐모론을 발의하자 윤리와 기강에 죄를 얻음이 심하다는 내용의 차자를 올렸다가 이이첨등의 모함을 받아 삭직되었으며 고향에 내려가서 글씨와 그림으로 소일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 때 사헌부장령에 복직하고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로로 성균관사성으로 통정대부의 가자(정삼품)를 받았으며 이어서 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로 승진되고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영남호소사 장현광의 추천으로 경상좌도의병대장이 되어 전주에 있던 왕세자를 보호하고 1629년 형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그 해에 별세하셨다 선생은 직언을 잘하기로 이름 높았으며 의리가 강해 광해군의 난정 때 간당들에게 모함을 받은 이덕형 이원익 영창대군을 구출하려고 힘쓰고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명나라에 갔을 때 그 곳의 학사 대부들과 수창한 시는 사람들에게 애송되어 명나라사람들이 그를 이적선(이태백)이라 불렀다고 하며 현재 1,000여 수의 시가 전해지며 저서로는 경정집(敬亭集) 조천록(朝天錄) 등이 있으며 의성의 장대서원에 제향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산뜻하게 새롭고 우아하며 힘차다라는 의미의 청신아건(淸新雅健)은 주로 문장을 표현할 때 쓰는 수식 성어로서 문장가들의 문장에 대한 품평을 청신아건으로 주고받는다면 문인으로서 즐거울 것이다 필자의 선조들이 남긴 유묵이 예전 화적떼의 습격으로 소실되어 전하질 않아 외람되게도 선조들의 글을 보지를 못하다가 외가의 까마득한 외현조 할아버지에 대한 글을 보며 그 글에 평가를 읽고 쓰면서 필자는 글을 잘 쓰지는 못해도 글 쓸려는 용기가 아마 외가의 피를 물러 받은 가 보다 혼자 웃으며 청신아건(淸新雅健)을 백운필담에 담고 휘호로 남긴다

桓紀 9217년 11월 4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