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흠신사수 欠伸思睡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2. 22. 11:41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흠신사수 欠伸思睡

하품 흠펼 신생각 사잘 수

 

하품하며 기지개켜고 잠에 졸리다

 

이 성어는 조선 효종숙종 때의 문신이고 학자인 목재 홍여하(木齋 洪汝河1621-1678)선생의 문집인 목재집(木齋集)목재선생문집(木齋先生文集)권사(卷四)에 이대방 구에게 답하다(答李大方 榘)에서 발췌하다

 

至於史學 尤東人所不屑爲 지어사학 우동인소불설위

大國史記 小國事往往致詳 대국사기 소국사왕왕치상

而東史反不載 天下事 이동사반불재 천하사

文體豈宜爾耶 문체기의이야

且東人恥不知中國事 차동인치불지중국사

不恥不知自家國事 불치불지자가국사

漢陰 白沙諸公 尙然 他何望 한음 백사제공 상연 타하망

譬慣誦別人譜牒 비관송별인보첩

問以渠家事 則不知也 문이거가사 즉부지야

蓋以東史措詞俚俗不雅馴 개이동사조사리속불아순

薦紳先生 羞道 천신선생 수도

而罕稱之 如太史公 所謂 三皇以上事耳 이한칭지 여태사공 소위 삼황이상사이

史家文字 要淘洗峻潔不沾沾 사가문자 요도세준결불첨첨

結得斬截 照應有法 始堪讀 결득참절 조응유법 시감독

羅麗史 猥宂煩瑣 라려사 외용번쇄

令人讀未半 欠伸思睡 령인독미반 흠신사수

有史不堪讀 卽與無同耳 유사불감독 즉여무동이

至於人主不以取觀 筵臣不以進讀 지어인주불이취관 연신불이진독

甚非經國之宜也 심비경국지의야

 

역사학에 이르러서는 우리 동방 사람들은 더욱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대국의 역사 기록엔 소국의 일을 종종 상세하게 기록 하지만

우리 동방의 역사에는 반대로 천하 태초의 일이 실리지 않으니

문체가 어찌 마땅히 이래야 하겠습니까

또 우리 동방 사람들은 중국의 역사를 모르는 것은 부끄러워하면서

자기 가정과 나라의 역사를 모르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한음 백사 제공들도 오히려 그러한데 다른 사람들에겐 무엇을 바랄 것입니까

비유하면 습관이 다른 사람의 보첩은 줄줄 외우면서

자기 집안의 내력을 물으면 즉 알지 못합니다

대개 우리 동방의 역사에 실린 말이 우아하게 길들여지지 않아서

벼슬아치선생들은 말하는 것도 부끄러워하고

마치 태사공이 이른바 삼황이상은 일일 뿐이다 라고 한 것처럼 가끔씩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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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나라를 경영하는 마땅한 일이 아닙니다

 

이 성어는 조선 효종숙종 때의 문신이고 학자인 목재 홍여하(木齋 洪汝河1621-1678)선생이 활재 이구(活齋 李榘16131654)선생과 주고받은 편지글에서 발췌를 하였는데 활재 이구선생은 본관은 전주 자는 대방(大方) 병자란에 거업을 폐하고 학문에 전심하여 주렴계의 태극설의 뜻을 발휘하여 태극도설을 지었고 아호의 이기설을 극변하여 이기 변증을 지었으며 이 모두 묘한 경지까지 연구한 것으로써 스승에게 전수를 받은 것이 아니고 마음속에서 스스로 자득한 것으로 사단 칠정에 있어서는 자세히 분석하여 동지들을 규합하여 예조에 자세하게 변명하였으며 이 까닭에 이름이 더욱 중해지고 몸가짐은 더욱 굳건해졌으며 선생의 시문집인 활재집은 본집 7권과 부록을 합하여 모두 4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선생의 사후에 문인들을 중심으로 문집의 간행이 추진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권말에 수록되어 있는 이유의 발문을 작성하는 시점이 1737(영조 13)인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한국학중앙연구원]

 

목재 홍여하선생은 본관이 군위 부계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외 산택재(山澤齋)이고 아버지는 대사간 홍호(洪鎬)이며 어머니는 고종후(高從厚)의 딸이고 효종 5(1654) 진사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고 이어 대교 봉교 등을 역임하고 정언에 이르러 효종에게 시사를 논하는 소를 올려 왕의 가납을 받았으나 반대파의 배척을 받아 고산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1년 만에 사퇴하였으며 1658년 다시 나아가 경성판관이 되었고 왕의 하문에 의하여 소를 올렸으나 그 소문에 이후원을 논박한 구절로 말미암아 이조판서 송시열이 사직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켜 황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가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숙종 즉위년(1674) 2차 복상문제로 송시열이 추방되는 등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자 다시 등용되어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이어 사간에 이르렀으며 주자학에 밝아 당시 사림의 종사로 일컬어지고 1689년 부제학에 추증되고 상주의 근암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목재집이 있고 편서로는 주역구결 의례고증 사서발범구결 휘찬여사 동사제강 해동성원 경서해의 등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하품하며 기지개켜고 잠에 졸리다 라는 오늘의 성어 책을 들기만 하면 흠신사수(欠伸思睡)에 빠지는 분도 있지만 우리가 우리의 조상 삼성조 환인 환웅 환검(단군)의 삼신의 내력은 흠신사수(欠伸思睡)에 빠져 들더라도 듣고 또 공부해야 마땅하다 생각하며 우리의 삼성신의 개천역사는 귀중한 것이기에 이 성어를 성어문집 백운필담에 담고 휘호로 남긴다

 

桓紀 9217118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