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유교근욕 諭敎勤縟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2. 23. 15:43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유교근욕 諭敎勤縟


깨우칠 유諭 가르침 교敎 부지런할 근勤 화문 놓을 욕縟

타이르고 가르침이 자상하고 정성스럽다

이 성어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청백리인 도곡 이의현(陶谷 李宜顯1669~1745)선생의 시문집  도곡집(陶谷集)권오(卷五)소차(疏箚)에 논척을 받고 체차를 청한 열 번째 소 임진년(1712) (被斥乞遞十疏 壬辰)에서 발췌하다

伏以臣扶將病母 憂遑焦灼 복이신부장병모 우황초작
日俟天地父母之少垂憐察矣 일사천지부모지소수련찰의 
伏奉批旨 諭敎勤縟 복봉비지 유교근욕 
又不允所辭 우불윤소사 
臣於是益切隕惑 罔知所以自措也 신어시익절운혹 망지소이자조야 
聖意所在 雖不敢妄有揣度 성의소재 수불감망유췌탁 
而豈不以方伯之任 委托不輕 이기불이방백지임 위탁불경
有難輒許其解免  유난첩허기해면 
如前日筵中所敎而然耶 여전일연중소교이연야 
第此病劣煎撓 不能察擧職務之狀 제차병렬전요 불능찰거직무지상
前疏旣經屢陳 전소기경루진 
則聖鑑固已俯燭無餘矣 즉성감고이부촉무여의 
臣之受任 倐過一年 신지수임 숙과일년 
今雖得遞 計其替代納節 금수득체 계기체대납절 
自當至於周歲 則數遞之慮 亦非可論矣 자당지어주세 즉수체지려 역비가론의 
本道年事 慘被灾歉 來頭之憂 본도년사 참피재겸 래두지우 
亦且不細 而秋廵旣廢 역차불세 이추순기폐 
春廵又將不得行矣 춘순우장불득행의

엎드려 삼가 신은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근심스러움에 애를 태우면서 
날마다 천지부모가 아이들을 보듬는 것처럼 가엾게 보살펴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엎드려 상소에 대한 임금의 답변을 받들어보니 타이르고 가르침이 자상하고 성대하시어 
또 다시 사직을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은 이에 더욱 바로잡지 못하여서 어떻게 조치를 해야 할지를 잊어버렸습니다 
성상의 뚯이 어디에 있는지 비록 감히 망령되게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지방관리의 직임은 가볍게 맡길 수 없으니 
그 책임에서 면하고 벗어나서 갑자기 허락하기가 어렵다고 여기시는 것은 
전날 경연에서 하교하신 것처럼 그런 것입니까
제차 병이 들고 마음이 조리고 불안하여 직무를 잘 살필 수 없는 상태에 
전의 상소문에 이미 누차 아뢰었으니 
성상께서도 이미 남김없이 굽어 살피셔서 오로지 거울처럼 아실 것입니다
신이 직임을 맡은 지 벌써 한 해가 지나서 
지금 임기가 끝나 교대한다고 해도 교대하고 관직을 사직하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당연히 해를 채우게 마련이오니 자주 직임을 교대하는 우려도 논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본도의 농사는 참혹하게 자연재해흉년이 들어 다가올 날도 걱정인데
이 또한 작지 않은 일이나 도내의 각 고을을 가을 순찰을 이미 시행하지 못한데다 
도내의 각 고을을 봄 순찰도 장차 행하지 못할 형편입니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청백리인 도곡 이의현(陶谷 李宜顯1669~1745)선생이 숙종37년 6월 16일에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어 사은숙배하고 하직인사를 하였으나 우의정 조상우(趙相愚)에게 혐원(嫌怨)이 있어 경상 감사로 내려갈 때 가서 하직 인사를 하지 못하였는데 관찰사로 부임하자마자 조상우가 차자를 올려 논척하니 숙종이 무겁게 추고하라고 명하여 그래서 도곡선생은 열 차례의 차자를 올리게 된 것 중에 이 발췌문은 하나이다 이 차자를 올리는 과정에서 조상우가 임금을 인견(引見)할 때 그는 나라를 효도로 다스리는 상황에서 노모가 위독한 이의현을 체차하도록 허락해야 할듯하지만 방백의 직임은 자주 체차하기 어려우며 부득이할 경우에는 변통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우선 체차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므로써 도곡선생을 더욱 곤란을 겪게 만들었으며 마침 부임한 경상도는 자연재해로 흉년이 들어 민심이 피폐할 때로 된 상태에서 올린 소의 내용 중에 일부이다[한국고전번역원자료참조] 

도곡 이의현선생은 본관은 용인 자는 덕재(德哉) 아버지는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이며 어머니는 정창징(鄭昌徵)의 딸이며 김창협의 문인으로 문학에 뛰어나 숙종 때 대제학 송상기(宋相琦)에 의해 당대 명문장가로 천거되었으며 1694년(숙종 2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 설서정언금성현령 부교리를 거쳐 1707년 이조정랑  이어 동부승지 이조참의 대사간을 역임하였으며 부제학 대사성 황해도관찰사 도승지 경기도관찰사 예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경종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뒤이어 형조판서 이조판서 예조판서에 재임하던 중 왕세제(영조)의 대리청정문제로 소론 김일경등의 공격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뒤이어 목호룡의 고변으로 신임옥사가 일어나 많은 노론 관료가 죄를 입자 그 역시 정언 정수기의 논척으로 평안도 운산에 유배되었으며 영조가 즉위해 노론이 득세하자 풀려 나와 영조 1년 형조판서 이조판서 수어사 승문원제조 비변사유사당상 판의금부사 예조판서 양관대제학 우의정 판중추부사 영의정판중추부사 영중추부사 1742년 치사(나이가 많아 요즘의 정년퇴직)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으며 청검을 스스로 실천 청백리로 이름났으며 금양위박미비 충정공홍익한갈 등의 글씨가 있으며 저서로는 도곡집 32권이 있고 시호는 문간(文簡)공이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타이르고 가르침이 자상하고 정성스럽다 라는 의미인 오늘의 성어 유교근욕(諭敎勤縟)은 성스러운 어머니가 아이를 가르치는 모습같이 자상한 훈육교육관을 도곡선생은 곤란을 겪으면서도 임금의 은총을 바라면서 임금이 내린 답변의 글을 유교근욕이라 표현하시는 선생의 충정은 후인들인 우리들도 본받아야 할 자세라고 보며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선현들의 말씀을 되새기며 유교근욕(諭敎勤縟)을 백운필담에 담고 휘호로 남긴다

桓紀 9217년 11월 9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