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금학청풍 琴鶴淸風

백운선사 김대현 2020. 12. 29. 18:25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금학청풍 琴鶴淸風


거문고 금琴 학 학鶴 맑을 청淸 바람 풍風

금학처럼 고결하고 청아한 기품 즉 고결한 품격을 의미한다

이 성어는 조선 중기 문신 용담 박이장(龍潭 朴而章1547~1622)선생의 시문집인 용담선생문집(龍潭先生文集)권칠(卷七)부록(附錄)에 유사 신익황(遺事 申益愰)에서 발췌하다

嘗再赴京師 一以書狀 상재부경사 일이서상 
一以副价 償弧矢宿願 일이부개 상호시숙원 
往來行李 惟一詩囊 왕래행리 유일시낭
而已爲守宰也 則水原寧海丹陽靑松 이이위수재야 칙수원녕해단양청송 
皆有治績 務在抑豪猾字小民 개유치적 무재억호활자소민 
振紀綱厚風俗 其爲水原 진기강후풍속 기위수원 
有一王子狂易喪性 羈管城傍 유일왕자광역상성 기관성방 
刑殺人無忌憚 每持兵入官府 搏逐太守 형살인무기탄 매지병입관부 박축태수 
太守蒼黃走避山谷中 태수창황주피산곡중 
公至 王子復拔劍直入 有欲刺狀 공지 왕자부발검직입 유욕자상 
公凝然不少動 因諭以義理 공응연불소동 인유이의리 
王子感悟 卒爲善人 왕자감오 졸위선인 
吏民亦爲之安堵 리민역위지안도 
最後爲靑松 愛周王巖壑之勝 최후위청송 애주왕암학지승 
每公餘 籃輿獨往 嘯詠忘歸 매공여 람여독왕 소영망귀 
琴鶴淸風 邁古無比 금학청풍 매고무비

일찍이 두 번이나 명나라 북경에 갔었는데 한번은 서장관으로
또 한 번은 부사로서 다녀옴으로서 대장부가 꿈꿔왔던 소원을 이루셨다
북경에 왕래할 때에 오직 여행 짐은 시 주머니 하나뿐이었으며
각 고을 관을 지낸 곳은 수원 영해 단양 청송 등이었으며 
모두 치적이 있으셨다 힘쓰고 교활한 자들은 억누르고 일반 백성들은 기르는데 힘썼으며 
기강을 진작시키고 풍속을 돈후하게 하였으며 수원의 지방관이 되었을 때는 
왕자 한사람이 미쳐서 실성을 하여 성 옆에 붙잡아두고 관리를 하였다 
사람을 죽이는 걸 거리낌 없이 행하며 매번 흉기를 가지고 관청에 들어와 태수에게 달려드니
태수가 황급히 다급하게 산골짜기로 달아나 피하였는데 
공이 이르자 왕자가 다시 칼을 들고 곧장 들어와서 찌르려는 모습을 취했는데
공이 의연하게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응시하고 이로 인하여 의리로써 가르치니 
왕자가 깨닫고는 끝내는 선한 사람이 되었다 
관리와 백성 역시도 그렇게 하여 편안히 거처하였다
마지막으로 청송고을에 부사가 되었을 때 주왕산 바위 골짜기의 경치를 좋아하셔서 
매번 공무여가에 홀로 수레를 타고 가서 시를 읊조리다 돌아가는 것을 잊어버리셨는데
선생의 금학처럼 고결하고 청아한 기품은 먼 옛날에도 비교할 사람이 없으셨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중기 문신 용담 박이장(龍潭 朴而章1547~1622)선생의 시문집인 용담선생문집에 극재 신익황(克齋 申益愰1672~1722)선생이 찬한 유사(遺事)에서 발췌하였는데 용담 박이장선생은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숙필(叔彬) 호는 용담외 도천(道川)이고 아버지는 승지 박양좌(朴良佐)이며 어머니는  성산배씨(星山裵氏)로 별좌(別坐) 배은(裵垠)의 딸이고 어려서 가학을 수업하고 23세에는 조식(曺植)을 찾아 덕산에 갔으며 선조 5년(1572) 사마시의 향시와 이듬해 사마시의 회시에 합격한 후 1574년 노수신(盧守愼)을 찾아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한 때 영숭전참봉으로 나갔으나 곧 사직하고 돌아와 학문에 몰두하다가 그후 1586년 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 홍문관수찬 교리 등을 지내고 1591년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임진왜란 때 김성일(金誠一)의 주청으로 종사관이 되어 크게 활약하고 1593년 10월 사헌부지평 지제교 사간원정언을 지내고 다음 해 이조좌랑 이어서 세자시강원사서를 겸직하고 1595년 이조정랑 홍문관부응교를 거쳐 1599년 사간원사간 사헌부집의에 있을 때 홍여순(洪汝諄)을 탄핵하였으며 1601년 성균관전적 상의원정을 지내고 이듬해 사헌부집의 홍문관직제학겸시강원보덕 동부승지 참찬관을 역임하였으며 당시 유영경(柳永慶)파인 소북(小北)으로서 반대 세력을 비방 탄핵하였으며 1603년 동지정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대사헌 이조참판 홍문관부제학을 지내고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을 논계하였으며 이듬해 대사간이 되고 이어 동지춘추관사 대사성을 거쳐 다시 대사간이 되었으며 1615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는 만언소를 올렸다가 삭직되었으며 그 뒤 성주로 내려가 저술과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경상도 초계(草溪)에서 졸하였다 문장에 능했으며 특히 시에 이름이 있었으며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술로는 용담집龍潭集) 정서절요(程書節要) 육경여해(六經蠡海)가 있다
극재 신익황(克齋 申益愰1672~1722)선생은 경북 인동 출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명중(明仲) 아버지는 수사 신명전(申命全)이며 1692년(숙종 18)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선생의 재주를 아껴 병조에서 과거에 응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사양하였으며 그 학덕으로 인해 1708년 천거되어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퇴하고 1717년 천거에 의해 의영고주부가 되었으나 이 또한 왕에게 나아가 사은(謝恩)하고 바로 돌아와서 학문에만 전념한 학자였는데 그 당시 영남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권두인(權斗寅) 권두경(權斗經) 이재(李栽) 정사신(丁思愼) 권중도(權重道) 등과 학문적으로 교류하였으며 저서로는 극재집(克齋集) 운곡도산휘음(雲谷陶山徽音) 경재집해(敬齋集解) 이기성정통간도(理氣性情通看圖) 동국승경와유록(東國勝景臥遊錄) 등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영조 41년(1765) 아들 신염(申琰)의 공로로 사헌부대사헌에 추증되었으며 정조 8년(1784) 사림들이 모여 그의 위패를 곤산서원(崑山書院)에 봉안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금학처럼 고결하고 청아한 기품 즉 고결한 품격을 의미하는 오늘의 성어 금학청풍(琴鶴淸風)을 성어문집에 담으며 이곳 청송 주왕산의 빼어난 산세를 용담선생이 매우 사랑하셨다는 이야기에 다시 한 번 더 눈길을 멈추며 금학청풍(琴鶴淸風)을 휘호로 남긴다

桓紀 9217년 11월 15일 저녁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