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도피영요 饕被榮耀

백운선사 김대현 2021. 1. 2. 18:05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도피영요 饕被榮耀


탐할 도饕 이불 피被 꽃 영榮 빛날 요耀

욕심스럽게 영광을 입다 즉 외람되게 칭찬과 존경을 받아 자랑스럽게 빛나는 영광을 입다

이 성어는 조선시대 문신 학자 우계 성혼(牛溪 成渾1535~1598)선생의 시가와 산문을 엮은 우계선생집(牛溪先生集)권이(卷二)장소일(章疏一)에 이조 참의로 옮겨 제수하자 정중히 사양한 두 번째 소(第二疏)에서 발췌하다

竊念臣之難仕在於癃疾 절념신지난사재어륭질 
若夫神識之昏奪 思慮之謬錯 今不暇言 약부신식지혼탈 사려지류착 금불가언 
只是焦枯柴毁 不任陳力 지시초고시훼 불임진력 
雖欲隨行逐隊 而其道無由 수욕수행축대 이기도무유 
故前後辭章 悉陳病癈之狀 고전후사장 실진병폐지상 
而微誠不格 昭鑑未回 이미성불격 소감미회 
遂致俯勞天語 重賜丁寧 수치부로천어 중사정녕 
祗讀感泣 涕下被面 지독감읍 체하피면 
嗚呼 臣若有一分筋力可堪從仕 오호 신약유일분근력가감종사 
則何敢不念罔極之恩 즉하감불념망극지은 
而務爲辭避之紛紜哉 이무위사피지분운재 
今使臣冒昧分義 拜受新除 금사신모매분의 배수신제 
亦不過引疾丐休 歸於解褫而已 역불과인질개휴 귀어해치이이 
夫以不堪君恩之重 而扶曳受命 부이불감군은지중 이부예수명 
饕被榮耀 無少報效 도피영요 무소보효 
則冒濫之誅 死有餘責 즉모람지주 사유여책 
而於國家 終亦何補 이어국가 종역하보 
臣決知其如此 而臣不自言 신결지기여차 이신불자언 
則是苟得爲利而欺罔君父也 즉시구득위리이기망군부야 
臣何敢不再辭乎 신하감불재사호

몰래 생각하니 신이 벼슬하기 어려운 것은 오랜 질병이 있어서
정신이 혼미하고 잃어버리거나 사려가 그릇되고 맞지 않아 이제 말씀드릴 여유가 없습니다
단지 몸이 수척하고 상을 당해 몸이 여위어 맡은 일에 능력을 펼 수가 없으니
비록 조정의 대열에서 대오를 따르고자 하나 마땅한 길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전후의 사양했던 글에 남김없이 깊이 병든 상태를 아뢰었는데 
미미한 정성으로 감동시키지를 못해 밝게 빛나는 임금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여 
드디어 위로하는 임금님의 말씀을 내리시어 거듭 정녕 하사하시니
공경히 읽고서는 감읍하여 흐르는 눈물이 얼굴을 덮었습니다
아하 신이 만약 아주 조금이라도 근력이 있어서 벼슬에 종사하여 견딜 수 있다면 
어찌 감히 망극한 은혜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힘써 어지러이 분분하게 사양하여 피하기를 하겠습니까
지금 신이 어리석게도 분의를 무릅쓰고 새로 제수한 관직을 절하고 받았지만
또 질병으로 인해 그만두기를 청할 것이며 해직하고 이미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대개 임금의 막중한 은혜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병든 몸을 부축하고 명령을 받아 
욕심스럽게 영광을 입고 다소의 보은도 하지 못한다면 
무릅쓰고 참람하게 벌을 준다 해도 죽어도 남는 죄가 있을 것이니 
나라에 결국 또한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신의 결심이 이와 같음을 분명히 아오니 신이 만약 스스로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이는 구차히 벼슬을 얻어 이익으로 삼아 임금과 애비를 속이는 것이므로
신이 어찌 감히 두 번이나 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시대 문신 학자 우계 성혼(牛溪 成渾1535~1598)선생이 이조 참의로 옮겨 제수하자 정중히 사양한 두 번째 소(第二疏)에서 발췌하였는데 우계선생은 해동십팔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이황의 주리론과 이이의 주기론을 종합해 절충파의 비조가 되었으며 본관은 창녕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 또는 묵암(默庵)이며 아버지는 조광조의 문인인 수침(守琛)이며 명종 6년(1551) 어린나이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병이 나서 복시에는 응하지 않았으며 백인걸의 문하에 들어가 상서(尙書)등을 배우고 20세에 한 살 아래의 이이와 도의의 벗이 되었으며 선조 1년(1568)에는 이황을 만났으며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을 제수받은 것을 시작으로 계속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1573년 공조좌랑 사헌부지평 1575년 공조정랑 1581년 내섬시첨정 1583년 이조참판 1585년 동지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받았으나 대부분 취임하지 않거나 사직상소를 올리고 곧 물러났으며 1584년 이이가 죽자 서인의 영수가 되어 동인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동인의 최영경(崔永慶)이 원사(寃死)할 위험에 처했을 때 정철(鄭澈)에게 구원해줄 것을 청하는 서간을 보내는 등 당파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1591년 율곡집을 평정(評定)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천에 머무르던 광해군의 부름을 받아 의병장 김궤(金潰)를 돕고 곧이어 검찰사에 임명되어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과 함께 일하였으며 이어 우참찬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1594년 일본과의 강화를 주장하던 유성룡 이정암(李廷馣)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으며 이에 걸해소(乞骸疏)를 올리고 이듬해 파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다 죽은 뒤인 1602년(선조 35)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관직을 빼앗겼으나  인조 11년(1633) 복관사제 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숙종 7년(1681)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여산 죽림서원 창녕 물계서원 해주 소현서원 함흥 운전서원 파주 파산서원 등에 제향되고 저서로 우계집 주문지결 위학지방도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공이시다[다음백과 참조]

욕심스럽게 영광을 입다 즉 외람되게 칭찬과 존경을 받아 자랑스럽게 빛나는 영광을 입다 라는 오늘의 성어 도피영요(饕被榮耀)를 국가로부터 입고도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저마다 일한다하면서 개인의 안위만을 챙기는 인물은 되지 말자라고 되새기면서 도피영요(饕被榮耀)를 휘호하고 성어문집 백운필담에 담는다

桓紀 9217년 11월 19일 저녁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