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광보승평 光輔昇平

백운선사 김대현 2021. 1. 5. 11:26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광보승평 光輔昇平


빛 광光 도울 보輔 오를 승昇 평평할 평平

크고 빛나게 도와서 나라가 안정되어 아무런 걱정이 없다 즉 크고 빛나게 태평성대를 돕다 라는 의미이다

이 성어는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인 목재 홍여하(木齋 洪汝河1621~1678)선생의 시문집인 목재선생문집(木齋先生文集)권오(卷五)에 충재 권선생문집 서문(沖齋權先生文集序)에서 발췌하다

惟我盛朝治化隆洽二百年間 유아성조치화륭흡이백년간
碩德英材 膺期迭出 光輔昇平 석덕영재 응기질출 광보승평 
崇極而圮 遭罹陽九 숭극이비 조리양구 
孼臣乘機 竊弄國柄 얼신승기 절롱국병 
芟薙善類 流毒生民 삼치선류 류독생민 
構大禍變者凡三焉 구대화변자범삼언 
始於戊午 中於己卯 시어무오 중어기묘 
終於乙巳而極矣 종어을사이극의 
沖齋權先生 生是時 喬桐末 충재권선생 생시시 교동말 
已擢第 旋幸被削 이탁제 선행피삭 
不爾 惡知不遂批鱗而速禍哉 불이 악지불수비린이속화재 
建中廟初載 便釋褐入翰苑 건중묘초재 편석갈입한원 
倡議率同僚 伸佔畢之冤 士論快之 창의솔동료 신점필지원 사론쾌지 
及膺顯遇 與己卯諸賢 同心輔理 급응현우 여기묘제현 동심보리 
而多乘銳奮發 務爲激切 이다승예분발 무위격절
先生以正大弘毅之量 欲濟以和平 선생이정대홍의지량 욕제이화평 
維匡其間 言不施而先生去矣 유광기간 언불시이선생거의 
晩更遭遇 位躋孤貳 만경조우 위제고이 
不幸 中 仁繼陟 불행 중 인계척

생각하니 우리 성스런 왕조의 다스림과 교화가 극진히 윤택한 이백여년 간 
높은 덕을 가진 석덕 영재들이 시기에 맞게 번갈아 나와서 크게 태평성대를 도왔다
지극히 높아지면 무너지는데 아홉수의 재앙 양구액운을 만나 
요망스런 신하들이 기회를 틈타서 국가의 권력을 훔쳐서 농락하고 
선한 무리들을 싹둑 깎아 베어 내고 백성에게 해로움을 끼쳐서 
큰 재앙의 변을 얽고 일으킨 것이 무릇 세 번이나 있었으니 
처음은 연산군 4년 무오(1498)이고 중간은 중종 14년 기묘(1519)이며 
마지막은 인종 1년 을사(1545)때로 참으로 극에 달했다
충재 권벌 선생은 이때에 태어나 연산군 말년에 
(교동(喬桐)은 중종이 즉위하고 연산군을 폐하여 교동현으로 옮기면서 별칭으로 쓴 것 같다)
과거에 급제되자마자 곧바로 오히려 다행스럽게도 관직이 삭탈되어 
그러하지 않았다면 어찌 임금의 비위를 건드려 재앙을 불러 미치지 않을 줄 알았겠는가
중종 즉위 초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곧 한림원 예문관에 들어가서 
점필재의 신원을 위해 의론을 앞서서 창도하여 동료들을 인솔하자 선비들 논사가 통쾌해했다
어진 임금이 인재를 대우하니 이에 응함에 미쳐 기묘제현들과 뜻을 같이하여 도왔으며
이들은 예리한 기운을 바탕으로 분발하고 직설적이고 격렬하게 힘을 쓰는 일이 많았다
선생은 바르고 크나큰 아름다운 도량으로 평화로운 세상을 실현하고자 
오로지 양쪽의 사이를 바로잡았지만 선생의 말이 시행되지 않자 선생은 떠났다
만년에 다시 어진 군주를 만나 지위가 고이(좌 우찬성의 별칭)에 올랐으나 
불행하게도 중종 인종임금이 연이어 승하하였다

이 성어는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인 목재 홍여하(木齋 洪汝河1621~1678)선생의 시문집에서 목재선생이 충재 권벌(冲齋 權橃1478~1548)의 문집에 서문을 찬한 글 충재 권선생문집 서(沖齋權先生文集序)에서 발췌를 하였는데 충재 권벌선생은 본관은 안동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 외 훤정(萱亭) 송정(松亭)등이 있으며 아버지는 성균생원 증영의정 권사빈(權士彬)이며 어머니는 주부(主簿) 윤당(尹塘)의 딸이고 연산군 2년(1496) 생원시에 합격하고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 이어서 예문관검열 홍문관수찬 부교리 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고 1513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임할 때 당시 신윤무(辛允武) 박영문(朴永文)의 역모를 알고도 즉시 보고하지 않은 정막개(鄭莫介)의 당상관 품계를 삭탈하도록 청하여 강직한 신하로 이름을 떨쳤으며 1514년 이조정랑임명 된 뒤 여러 관직 등을 거쳐 1519년 예조참판에 임용되었을 때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들이 왕도정치를 극렬히 주장하자 기호지역 사림파와 연결되어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를 조정하려고 하였으며 그 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귀향한 후 15년 간 고향에서 지내다가 1533년 복직되어 용양위부호군 등 여러 관직을 거쳐 한성부판윤에 올랐으며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동지사 임권(任權)과 함께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 해 2월에 돌아왔으며 이후 병조판서등 여러 관직을 거쳐 1545년 8월 소윤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이 대윤 윤임(尹任)의 세력을 배척한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여 윤임 유인숙(柳仁淑) 유관(柳灌) 등을 적극 구하는 계사(啓辭)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곧 이어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고 길원군(吉原君)에 봉해졌으며 9월 우의정 이기와 우찬성 정순붕 등이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고 반대하여 삭훈(削勳)되었고 10월에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고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처음에는 구례로 유배지가 결정되었으나 곧 이어 태천(泰川)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삭주(朔州)에 이배(移配)되었으며 이듬 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후 1567년 신원(伸寃)되었고 이듬해 좌의정에 추증되고 1588년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591년(선조 2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공이시다 저서로는 충재문집(冲齋文集)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크고 빛나게 도와서 나라가 안정되어 아무런 걱정이 없다 즉 크고 빛나게 태평성대를 돕다 라는 의미인 오늘의 성어 광보승평(光輔昇平)을 이 땅에 태어난 후인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인지라 백운필담에 담고 휘호로 기록에 남긴다

桓紀 9217(경자)년 11월 22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