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연식무망 緣飾誣罔

백운선사 김대현 2021. 1. 6. 10:21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연식무망 緣飾誣罔


가선 연緣 꾸밀 식飾 무고할 무誣 그물 망罔

겉만 보기 좋게 치장하고 허위를 사실인 양 꾸며서 남을 속이다

이 성어는 조선 중기 영의정을 지낸 상촌 신흠(象村 申欽1566∼1628)선생의 시문집인 상촌고(象村稿)권삼십이(卷三十二)에 병인년 별시를 파방한 뒤에 논자의 말이 거짓임을 조목조목 진달하는 소(丙寅別試罷榜後條陳論者誣罔疏)에서 발췌하다

聖明 豈可不察臣之蹤迹 而強起之乎 성명 기가불찰신지종적 이강기지호
古人之得罪於朝廷者 君父雖不許退 고인지득죄어조정자 군부수불허퇴 
有帶職而出去者 事例炳然 유대직이출거자 사례병연 
伏願聖明恕臣退去 복원성명서신퇴거 
無使循私用情者汚穢朝班 무사순사용정자오예조반 
抑臣竊有所憂者 試院之事 억신절유소우자 시원지사 
人所指摘者追捧一事 인소지적자추봉일사 
而追捧始末 如上所陳 이추봉시말 여상소진
其餘所傳行私之說 기여소전행사지설 
臺論亦以未必不出於煽動爲言矣 대론역이미필불출어선동위언의 
朝廷體面甚重 每事一聽於訛言而奉行之 조정체면심중 매사일청어와언이봉행지 
則國家之事 其不危且殆乎 즉국가지사 기불위차태호 
臣將退去 不避嫌逼而覼縷焉 신장퇴거 불피혐핍이라루언 
不敢緣飾誣罔 以欺殿下 불감연식무망 이기전하 
伏願聖明採納焉 복원성명채납언 

임금의 어질고 밝은 지혜는 어찌 신의 자취를 살피지 않고 억지로 일어나게 하십니까
옛사람은 조정에 죄를 얻게 되면 임금이 비록 물러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도 
직함을 지닌 채 물러난 자가 있어 사례가 확실합니다
엎드려 원컨대 임금의 어질고 밝은 지혜는 신의 물러감을 용서하시고
사사로운 정을 쫒아 쓴 자로 하여금 조정 반열을 거칠고 더럽히지 못하게 하십시요
구부려 몰래 신이 근심스러운 바가 있사오니 과거 시험을 치르는 일에 대해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은 추후에 받아들일 하나의 일인데
추후에 받아들일 처음과 끝은 위에서 열거한 것과 같으며 
그 나머지 전하는 것은 사사로이 행 하였다는 설은
사헌부 사간원의 탄핵 논의 또한 반드시 선동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조정의 체면이 매우 중요한데 모든 일을 하나같이 거짓말을 듣고 그것을 봉행한다면 
즉 국가의 일이 위험하고 또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신이 장차 물러가게 되어 혐의를 피하지 않고 자세히 실마리를 말씀드렸사온데
감히 겉만 치장하고 허위를 사실인 양 꾸며 속이기 위해 전하를 속이는 것은 아닙니다
엎드려 원하오니 임금의 어질고 밝은 지혜로 의견을 받아들이소서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중기 영의정을 지낸 상촌 신흠(象村 申欽1566∼1628)선생이 병인년 별시를 파방한 뒤에 논자의 말이 거짓임을 조목조목 진달하는 소(丙寅別試罷榜後條陳論者誣罔疏)에서 발췌하였는데 상촌 신흠선생은 본관은 평산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 외 현옹(玄翁) 방옹(放翁) 현헌(玄軒)이며 아버지는 개성도사 신승서(申承緖)이고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로 송기수(宋麒壽)의 딸이며 송인수(宋麟壽)와 이제민(李濟民)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선조 18년(1585)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고 1586년 승사랑(承仕郎)으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불미스런 일로 종9품직인 성균관학유에 제수되고 경원훈도 광주훈도 사재감참봉 예문관봉교 사헌부감찰 병조좌랑 등 여러 관직을 거쳐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청하는 주청사 윤근수(尹根壽)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로로 군기시정에 제수되고 함경도어사와 의정부사인을 거쳐 1608년(광해군 즉위년) 선조애책문(선조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짓고 한성부판윤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1610년에는 동지경연사 동지성균관사 예문관대제학을 겸한 후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인 까닭에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고 1616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및 이와 관련된 김제남(金悌男)에의 가죄(죄를 더함)와 함께 다시 논죄된 뒤 춘천에 유배되었으며 1621년에 사면된 후 인조 즉위년(1623) 3월 인조의 즉위와 함께 이조판서 겸 예문관홍문관의 대제학에 중용되고 같은 해 7월에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하였으며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오른 후 죽었다 선생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으나 학문에 전념하여 벼슬하기 전부터 이미 문명을 떨쳤으며 벼슬에 나가서는 서인인 이이와 정철을 옹호하여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선조의 신망을 받으면서 항상 문한직(文翰職)을 겸대하고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문운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또한 사림의 신망을 받음은 물론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정종(正宗) 또는 월상계택(月象谿澤 月沙 이정구 象村 신흠 谿谷 장유 澤堂 이식을 일컬음)으로 칭송되었으며 효종 2년(1651) 인조묘정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공이시며 저서 및 편서로는 상촌집 야언(野言) 등과 현헌선생화도시(玄軒先生和陶詩) 낙민루기(樂民樓記) 고려태사장절신공충렬비문(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碑文) 황화집령(皇華集令)등이 있다

겉만 보기 좋게 치장하고 허위를 사실인 양 꾸며서 남을 속이다 라는 오늘의 성어 연식무망(緣飾誣罔)은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혼란하면 서로 권력을 쟁취하기위해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사실인양 꾸며서 일반국민들이 믿고 따르도록 하는 반국가적 자기 권력유지 수구를 위한 수단으로 연식무망(緣飾誣罔)을 서슴치 아니하고 자행하다보니 어리숙한 국민은 옳고 그름의 판가름을 할 수 없으므로 그들의 마수에 걸려 그들의 주창에 추종하여 그들을 옹호하고 오히려 더 앞장서서 울분을 토하는 경우가 어찌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다름이 없으니 서글프지 않는가 소위 위정자라면 위정자답게 위정하길 바라면서 연식무망(緣飾誣罔)하지 않는 생을 살기위해 성어문집 백운필담에 담아놓고 휘호로 남겨 가슴에 새긴다

桓紀 9217(경자)년 11월 23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