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경황초작 驚遑焦灼

백운선사 김대현 2021. 1. 8. 11:19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경황초작 驚遑焦灼


놀랄 경驚 허둥거릴 황遑 그을릴 초焦 사를 작灼

놀라 허둥거리며 마음이 몹시 초조하다 

이 성어는 조선 후기 문신 약천 남구만(藥泉 南九萬1629~1711)선생의 시문집 약천집(藥泉集)제십(第十) 소차(疏箚)에 과천에 이르러 사직한 상소(到果川辭職疏)에서 발췌하다

伏以臣在平澤縣 祗承史官傳諭疏批 복이신재평택현 지승사관전유소비 
伏審聖候違豫 久未復常 복심성후위예 구미부상 
驚遑焦灼 日夕奔馳 경황초작 일석분치 
昨到果川地 瞻望神京  작도과천지 첨망신경 
只隔一衣帶水 지격일의대수 
其在犬馬戀主之忱 葵藿傾陽之性 기재견마련주지침 규곽경양지성 
又當議藥問安之時 豈不欲催裝疾行 우당의약문안지시 기불욕최장질행 
重入禁闥 以展朝夕起居之禮哉 중입금달 이전조석기거지례재 
但念臣罪累如山 咎責溢世 단념신죄루여산 구책일세 
決無更踐朝端之理 결무경천조단지리
且念此內局提調之任 乃是保護聖躬之地 차념차내국제조지임 내시보호성궁지지 
誠不可一日曠闕 而臣自夏間奔逬出都之後 성불가일일광궐 이신자하간분병출도지후 
不能苦辭得解 及至歸伏遐鄕 불능고사득해 급지귀복하향 
雖曾一再陳懇 然未能連續封章 수증일재진간 연미능련속봉장 
必以卽遞爲期 至於聖躬未寧之後 필이즉체위기 지어성궁미녕지후 
乃煩召命之遠降 내번소명지원강 
此實緣臣虛帶踰時 不早自處之致 차실연신허대유시 불조자처지치 
其罪一也 기죄일야

삼가 신이 평택현에 있으면서 사관이 임금이 내린 상소의 대답을 전한 것을 삼가 받들었는데 
삼가 임금의 환후가 오랫동안 평상을 회복 못하셨다는 소식을 알고는 
놀라 허둥거리며 마음이 몹시 초조하여 밤낮주야로 쫒아왔습니다
어제 과천 땅에 이르러서 서울 경성을 바라보니 
다만 한 가닥 옷의 띠처럼 건너기 쉬운 물(한강)이 있는 거리일 뿐입니다 
개나 말이 주인을 그리워하는 정성이나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하는 천성이 저도 있습니다
또 문안할 때 약을 마땅히 의논하는데 어찌 행장을 재촉해서 속히 꾸려 달려가서 
다시 대궐에 들어가 조석으로 문안하는 예를 펴고자 하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신의 죄가 산처럼 늘어지고 책망하는 말이 세상에 넘치니
결단코 다시는 조정을 밟을 수 있는 실마리의 이치가 없습니다
또 생각하니 내의원의 일을 관리 감독하는 직임은 바로 이는 성상의 몸을 보호하는 자리이니 
진실로 단 하루도 직책을 비워서는 안 되며 그런데 신이 여름에 도망치듯 성을 나온 뒤로 
끝까지 사양하였으나 해임되지 못하였고 돌아와서 멀리 시골에 엎드려 지내면서 
비록 일찍이 한두 번 간곡히 진언했지만 그러나 연달아 소장을 올려
반드시 곧 체직되기를 기약하지도 능히 못하였으며 임금님의 옥체가 편찮으신 뒤로는 
이에 번거롭게 멀리까지 소명을 멀리내리시게 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신이 헛되이 오랜 기간 관직 맡은 인연으로 스스로 일찍 처리하지 못한 일이라서 
그 죄가 첫째입니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후기 문신 약천 남구만(藥泉 南九萬1629~1711)선생의 시문집에 소차(疏箚)에서 과천에 이르러 사직한 상소(到果川辭職疏)한 상소문중에서 발췌를 하였는데 약천 남구만선생은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 또는 미재(美齋)이며 개국공신 남재(南在)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남식(南烒)이고 아버지는 현령 남일성(南一星) 어머니는 권엽(權曗)의 딸이며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효종 2년(1651) 진사시에 합격하고 효종 7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가주서 전적 사서 문학을 거쳐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효종 10년 홍문록에 오르고 곧 교리에 임명되었으며 현종 1년(1660) 이조정랑에 제수됐고 이어 집의 응교 사인 승지 대사간 이조참의 대사성을 거쳐 현종 9년 안변부사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했으며 1662년 영남에 어사로 나가 진휼 사업을 벌였고 현종 15년 함경도관찰사로서 유학(儒學)을 진흥시키고 변경 수비를 튼튼히 하였으며 숙종 초 대사성 형조판서를 거쳐 숙종 5년 좌윤이 되었으며 같은 해 윤휴(尹鑴) 허견(許堅) 등의 방자함을 탄핵하다가 남해(南海)로 유배되었으며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 부제학 대사간 등을 역임했으며 숙종 6년과 숙종 9년 두 차례 대제학에 올랐으며 병조판서가 되어 폐한 사군(四郡)의 재설치를 주장해 무창(茂昌) 자성(慈城) 2군을 설치했으며 군정(軍政)의 어지러움을 많이 개선했으며 숙종 10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 숙종 13년 영의정에 올랐으며 이즈음 송시열(宋時烈)의 훈척비호를 공격하는 소장파를 주도해 소론의 영수로 지목되었으며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나고 숙종 20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고 숙종 22년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며 숙종 27년 희빈 장씨의 처벌에 대해 중형을 주장하는 김춘택(金春澤) 한중혁(韓重爀) 등 노론의 주장에 맞서 경형(輕刑)을 주장하다가 숙종이 희빈 장씨의 사사를 결정하자 사직 낙향하였으며 그 뒤 부처(付處) 파직 등 파란을 겪다가 다시 서용되었으나 숙종 33년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가 기로소에 들어갔다 당시 정치 운영의 중심인물로서 정치 경제 형정 군정 인재등용 의례 등 국정 전반에 걸쳐 경륜을 폈을 뿐만 아니라 문장에 뛰어나 책문 반교문 묘지명 등을 많이 섰으며 또한 국내외 기행문과 우리 역사에 대한 고증도 많이 남겼고 서화에도 뛰어났으며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가 청구영언에 전하며 숙종 묘정에 배향되고 강릉의 신석서원  종성의 종산서원 무산의 향사 등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약천집 주역참동계주가 전하며 글씨는 좌상남지비 찬성장현광비 개심사 양화루 영송루의 액자를 남겼으며 시호는 문충(文忠)공이시다

놀라 허둥거리며 마음이 몹시 초조하다 라는 의미인 오늘의 성어 경황초작(驚遑焦灼)의 발췌문을 읽고 옛 선현들의 나라사랑에 감동하면서 놀라 허둥대며 붓 들고 경황초작(驚遑焦灼)을 휘호하고 성어문집 백운필담에 담는다

桓紀 9217(경자)년 11월 25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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