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비익필다 裨益必多

백운선사 김대현 2021. 1. 4. 10:47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비익필다 裨益必多


도울 비裨 더할 익益 반드시 필必 많을 다多

더하여 이로움이 반드시 많다

이 성어는 조선 개국 초부터 인조 때까지 약 250년 동안 편자 연대 미상의 야사 모음집인 대동야승 계갑일록(癸甲日錄) 추연우성전저(秋淵禹性傳著)에 만력 12년 갑신 선조17(1584)년(萬曆十二年甲申)에서 발췌하다

洪暹議李珥 珥爲國盡瘁 홍섬의리이 이위국진췌 
其志未及施設 而其身先沒 豈非可惜 기지미급시설 이기신선몰 기비가석 
隱卒崇終 允孚好賢之典 은졸숭종 윤부호현지전 
金貴榮議 李珥措設 금귀영의 리이조설 
間有不合時宜 而其爲國任事 간유불합시의 이기위국임사 
至爲可嘉 裁劑得中  지위가가 재제득중  
裨益必多 一病遞殞 비익필다 일병체운 
可謂不幸 至於褒贈之典 가위불행 지어포증지전 
在於天鑑孔昭 재어천감공소 
朴諄議 李珥追贈之意 박순의 리이추증지의 
臣昨已啓達 故不得獻議 신작이계달 고불득헌의 
鄭惟吉議 李珥才學之贍 정유길의 리이재학지섬
忠愛之美 人所罕及 충애지미 인소한급 
欲置之岩廊觀其施設 而天不假年 욕치지암랑관기시설 이천불가년 
齎志而沒 知其人者 孰不憐痛 재지이몰 지기인자 숙불련통
經席之啓 必以此也 경석지계 필이차야 
追崇之典 恐無不可 추숭지전 공무불가 
但恩命所係 臣何敢擅 단은명소계 신하감천 

홍섬이 이이에 관해 윗사람들에게 의논하기를 이이는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다가 병이 들어 
그 품은 뜻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몸이 먼저 죽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죽음을 애도하고 사후를 높여 주는 것은 진실로 어진 이를 좋아하는 의례입니다 하였으며
김귀영이 윗사람들에게 의논하기를 이이가 시행하였던 것은 
간혹 시대의 뜻에 적합하지 않은 점이 있었으나 그가 나라를 위하여 맡아 일을 함에는 
지극히 훌륭하였으니 그가 지었던 일이 중도에 맞았더라면 
더하여 이로움이 반드시 많았을 터인데 한 번 병들어 갑자기 돌아가니 
가히 불행하다 하겠습니다 포상과 증직의 의례에 이르면 
밝으신 임금님의 보살핌에 있습니다 하였으며
박순이 의논하길 이이를 추증의 뜻은 
신이 어제 이미 아뢰었으니 고로 윗사람들에게 의논하지 않겠습니다 하고였으며 
정유길이 윗사람들에게 의논하기를 이이의 재주와 학식의 넉넉하고 풍부하여 
나라에 충성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움은 사람들의 미침이 드물지만
조정에 두어 그가 계획을 세우고 시행하는 것을 보고자 했으나 하늘이 나이를 더 주지 않아 
뜻을 지닌 채 죽었으니 그 사람됨을 아는 자라면 누군들 마음 아프지 않겠습니까
조정 경연의 자리에서 영상이 아뢴 것도 필시 이 때문입니다
높이 받들어 우러르고 공경함의 의례는 아마 불가함이 없겠으나
다만 임금의 명령에 관계되는 일이니 신이 어찌 감히 멋대로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개국 초부터 인조 때까지 약 250년 동안 편자 연대 미상의 야사 모음집인 대동야승에 추연 우성전(秋淵禹性傳1542~1593)선생이 쓴 계갑일록(癸甲日錄)에서 발췌를 하였는데 추연 우성전선생은 본관은 단양 자는 경선(景善) 호는 추연 외 연암(淵庵)이고 생부는 현령 우언겸(禹彦謙)이고 양부는 우준겸(禹俊謙)이며 대사헌 허엽(許曄)의 사위이고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명종 16년(1561) 진사가 되고 1564년 성균관 유생들을 이끌고 승 보우(普雨)의 주살을 청원하기도 하였으며 선조 1년(1568)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 봉교(奉敎) 수찬(修撰) 등을 거쳐 1576년 수원현감으로 나가서는 명망이 높았으며 한때 파직되었다가 다시 장령(掌令) 사옹원정을 거쳐 1583년에 응교(應敎)가 되고 뒤에 여러 번 사인(舍人)을 지냈으며 동서분당 때 동인으로 그 뒤 이발(李潑)과 틈이 생기자 우성전은 남산에 살아서 남인 이발은 북악에 살아서 북인으로 분당되었고 남인의 거두로 앞장을 섰으며 동서분당 때나 남북의 파쟁에 말려 미움도 사고 화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1591년 서인인 정철(鄭澈)의 당(黨)이라 하여 북인에게 배척되고 관직을 삭탈당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나와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집해 군호를 추의군(秋義軍)이라 하고 소금과 식량을 조달해 난민을 구제하였으며 또한 강화도에 들어가서 김천일(金千鎰)과 합세해 전공을 세우고 강화도를 장악해 남북으로 통하게 하였으며 병선을 이끌어 적의 진격로를 차단하고 권율(權慄)이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에서 행주에 이르자 의병을 이끌고 지원하였으며 그 공으로 봉상시정에서 대사성으로 서용되고 그 뒤 계속 활약하였으며 용산의 왜적을 쳐서 양곡을 확보해 관군과 의군의 식량을 마련하고 그 뒤 퇴각하는 왜군을 경상우도 의령까지 쫓아갔으나 과로로 병을 얻어 경기도 부평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계갑록(癸甲錄) 역설(易說) 이기설(理氣說)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공이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더하여 이로움이 반드시 많다 라는 오늘의 성어 비익필다(裨益必多)의 발췌문을 읽으면서 발췌문 계갑일록을 쓰신 추연 우성전선생은 이황선생의 문인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보통의 제자는 필시 아니라는 것은 짐작가고도 남겠지만 추연선생이 이이선생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음으로서 이이선생에 대한 학문과 성품의 깊이를 가름하게하며 이이선생의 병약하지 않고 건강하게 더 오래 세상에 사셨다면 선생의 학문은 완벽하게 완성되지 않았을까 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발췌문 기록을 남긴 추연선생의 나라사랑은 필히 배워야하고 가슴 깊이 새겨놓아야 할 자세라고 보며 사람으로 태어나 비익필다(裨益必多)의 존재로서 종적을 뚜렷이 남기는 것이 나를 낳아 준 부모님에 대한 최소한의 효도라고 여기며 더하여 이로움이 반드시 많은 사람으로 남고자 비익필다(裨益必多)를 휘호하고 백운필담에 담아 놓는다

桓紀 9217(경자)년 11월 21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