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즙활혜궁 戢猾惠窮

백운선사 김대현 2021. 2. 5. 15:48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즙활혜궁 戢猾惠窮

그칠 즙교활할 활은혜 혜다할 궁

 

교활한 자를 막고 궁한 자에게 은혜를 주다

 

이 성어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도암 이재(陶菴 李縡1680~1746)의 시문집인 도암선생집(陶菴先生集) 권이십칠(卷二十七)에 판서 호곡 남용익(壺谷 南龍翼 1628~1692)공 신도비(判書 壺谷南公 神道碑)에서 발췌하다

 

乙未日本關白新立 朝廷遣信使 公爲從事 을미일본관백신립 조정견신사 공위종사

方涉海 颶風作 舟幾覆 방섭해 구풍작 주기복

舟中人無人色 公危坐柁樓 주중인무인색 공위좌타루

口呼誓神文以祝之 已而風定浪息 구호서신문이축지 이이풍정랑식

明年回泊馬島 島主持江戶僞狀 명년회박마도 도주지강호위상

迫令行拜于關白願堂 박령행배우관백원당

公以義折之 島主絶日供旬餘以脅之 공이의절지 도주절일공순여이협지

公藏舟閉館 若不欲歸者 공장주폐관 약불욕귀자

島主知不可屈 始遣歸 未還 被湖堂選 도주지불가굴 시견귀 미환 피호당선

蠻人以公不受例贈 送于朝 上命歸于公 만인이공불수례증 송우조 상명귀우공

公作詩分與玉堂 湖堂至今傳爲美事 공작시분여옥당 호당지금전위미사

公嘗於文臣庭試入格賜馬 공상어문신정시입격사마

是秋又魁重試陞通政 刑禮二曹參議 시추우괴중시승통정 형례이조참의

承政院承旨 乞外得楊州 승정원승지 걸외득양주

戢猾惠窮 會値因山 즙활혜궁 회치인산

而民不知有大役 이민불지유대역

又還喉院陞長席 極選也 우환후원승장석 극선야

先是尹善道假託禮論 構禍士林 선시윤선도가탁례론 구화사림

而趙絅爲善道伸救 語益悖 이조경위선도신구 어익패

公陳啓請治絅熒惑之罪 공진계청치경형혹지죄

後同春宋先生請放善道之謫 후동춘송선생청방선도지적

公進曰先正臣李珥請釋許篈 공진왈선정신리이청석허봉

而宣廟不許 此今日所當法也 士論韙之 이선묘불허 차금일소당법야 사론위지

 

효종 6년에 일본의 관백이 새로 위에 올라 조정에서 통신사를 보내는데 공이 종사관이 되었다

바야흐로 바다를 건너는 데 맹렬하게 폭풍이 불어 배가 거의 전복될 지경이었다

배 안 사람들은 모두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는데 공은 배의 키가 있는 선실에 바르게 앉아

신 앞에 맹세하는 주문을 외우며 그렇게 비니 이에 바람이 멈추며 파도가 잔잔해졌다

다음 해 돌아오다가 대마도에 정박하니 도주가 강호의 위조된 서장을 가지고는

협박하며 관백의 사당인 원당에 절을 하도록 억압하였다

공이 의를 내세워 그것을 거절하니 도주는 10여 일간 식사제공을 끊고는 위협하였다

공이 배를 숨기며 객관을 열지 않고 돌아가려하지 않는 것같이 느긋하게 지내니

도주는 공이 굴복하지 않음을 알고 비로소 돌려보냈다 돌아오기도 전에 호당에 선발되었는데

만인이 공에게 추증을 받지를 않았으나 조정에서 보내어 상명이 공에게로 왔으며

공이 지은 시는 옥당 홍문관에 분분하여 홍문관독서당에 오늘날까지 아름다운일로 전한다

공은 일찍이 문신의 정시에 입격하여 임금으로부터 말을 하사받았으며

이해 가을 또 중시에 장원하여 통정대부에 오르고 형조 예조의 참의

승정원의 승지를 지내고 외직으로 양주 목사가 되어

교활한 자들을 막고 궁한 자에게 혜택을 입혔는데 마침 인산(국상)을 맞았으나

백성들은 큰 역사가 있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또 승정원으로 돌아와 높은 장의 자리에 오르니 최상의 선발선택이었다

이보다 앞서 윤선도가 예론을 거짓으로 핑계하여 사림들에게 화를 입혔는데

조경이 윤선도를 위해 구하려는 말이 더욱 사리에 어그러졌다

공은 조경의 어수선하게 하려는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여

뒤에 동춘 송준길 선생이 윤선도를 유배에서 풀어주기를 청하니

공이 나아가 말하기를 지난 바른 신하 선정신 이이가 허봉의 석방을 청하였으나

선조는 윤허하지 않았는데 이는 오늘날 본받아야 할 바입니다 하니 사론이 바르게 여겼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후기의 문신인 도암 이재(陶菴 李縡1680~1746)선생이 찬한 판서 호곡 남용익(壺谷 南龍翼 1628~1692)공 신도비에서 발췌하였는데 호곡 남용익선생은 본관은 의령 자는 운경(雲卿) 아버지는 부사 남득명(南得明)이며 어머니는 신복일(申復一)의 딸이시며 인조 24(1646) 진사가 되고 1648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시강원설서 성균관전적과 삼사를 거쳐 병조좌랑 홍문관부수찬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고 잠시 경상도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삼사로 돌아왔으며 효종 6(1655) 통신사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관백의 원당에 절하기를 거절하여 음식 공급이 중지되고 여러가지 협박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았으며 이듬해 돌아와 호당(독서당)에 뽑혀 들어갔고 문신 중시에 장원 당상관으로 진급하여 형조 예조참의 승지를 역임하고 양주목사로 나갔으며 현종 때는 대사간 대사성을 거쳐 공조참판을 빼고는 전 참판을 지냈으며 잠시 외직으로 경상 경기감사로 나갔다가 형조판서에 올랐고 숙종 6(1680)부터 좌참찬 예문관제학을 역임하고 1689년 소의 장씨가 왕자를 낳아 숙종이 그를 원자로 삼으려 하자 여기에 극언으로 반대하다가 명천으로 유배되어 3년 뒤 그곳에서 졸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효종 현종 숙종 3대에 걸쳐 청화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문명을 날렸으나 즐거워하는 기색이 없었고 늘 근신하고 근면하였으며 저서로는 신라시대부터 조선 인조대까지의 명인 497인의 시를 모아 엮은 기아 및 부상록 그리고 자신의 시문집인 호곡집을 남겼으며 시호는 문헌(文憲)공이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교활한 자를 막고 궁한 자에게 은혜를 주다 라는 의미의 오늘의 성어 즙활혜궁(戢猾惠窮)의 정신으로 모든 공직자와 위정자 그리고 우리 일반인들 모두가 하나같이 이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반드시 그렇게 살아가길 바라면서 즙활혜궁(戢猾惠窮)을 휘호하고 백운필담에 담는다

 

桓紀 9217(경자)1224일 아침에 白雲仙士 金大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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