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감가봉문 坎坷蓬門

백운선사 김대현 2021. 2. 9. 16:47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감가봉문 坎坷蓬門

구덩이 감평탄하지 않을 가쑥 봉문 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초가집에서 가난하게 살다 또는 순탄치 못한 삶으로 숨어서 살다

 

이 성어는 조선 후기의 학자 강재 송치규(剛齋 宋穉圭 1759~1838)선생의 시문집인 강재선생집(剛齋先生集) 권칠(卷七)에 김진사 정렴에게 올리는 제문(祭金進士正廉文)에서 발췌하다

 

嗚呼痛哉 兄何爲而至於斯耶 오호통재 형하위이지어사야

自我過翁之易簀 자아과옹지역책

尊門諸少之所依賴者 惟兄一人而已 존문제소지소의뢰자 유형일인이이

兄何忍漠然相忘 而至於斯耶 형하인막연상망 이지어사야

死生有數 難容人力 사생유수 난용인력

則固非兄之相忘 而冥冥之中 즉고비형지상망 이명명지중

必有所齎恨者矣 其然乎其不然乎 필유소재한자의 기연호기불연호

嗚呼 計年則我少八歲 較氣則兄實強剛 오호 계년즉아소팔세 교기즉형실강강

竊謂我先於兄而使兄哭我 절위아선어형이사형곡아

豈意今日兄反遽使我哭之耶 기의금일형반거사아곡지야

嗚呼 兄以質愨之資 克修敦睦之行 오호 형이질각지자 극수돈목지행

處心忠厚 作事縝密 처심충후 작사진밀

宜其有壽考福履之享 의기유수고복리지향

而坎坷蓬門 飽經憂慽 이감가봉문 포경우척

未及中身 畢命旅舍 미급중신 필명려사

天乎天乎 此何事也 천호천호 차하사야

報施茫茫 久失其常 보시망망 구실기상

則此亦不必爲之深悲 즉차역불필위지심비

而齷齪 斯世 將不得復見 斯人 이악착 사세 장부득부견 사인

則余之所以哭之者 雖欲不慟 不可得矣 즉여지소이곡지자 수욕불통 불가득의

 

오호 슬퍼라 형은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우리 과옹이 삿자리를 바꾸어 돌아가시고

존경하는 문하의 모든 젊은이가 의지하는 바는 오직 형 한 분 뿐이었는데

형은 어찌 찬인하게 막연히 서로를 잊고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죽고 사는 건 운수가 있어 사람의 힘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우나

진실로 형을 잊은 것도 아닙니다만 아득한 저승에서

반드시 한을 가진바가 있을 겁니다 그런가요 아니 그런가요

오호 나이를 따지면 내가 여덟 살 작고 기운으로 비교하면 형이 실로 강하고 굳셉니다

몰래 내가 형보다 먼저 죽어 형으로 하여금 나를 위해 곡할 것으로 알았는데

어찌 오늘 형이 대려 갑자기 나로 하여금 곡하게 할 줄 알았겠습니까

오호 형은 본연그대로 성실한 자질로서 돈독하고 화목한 행실을 능히 잘 닦으셨고

마음 쓰기는 참으로 두텁고 일을 할 때는 맑고 꼼꼼하게 치밀하며

장수를 하셔야하고 생각해보면 복록을 누려야 마땅 하온데

초가오두막집에서 고생고생하시면서 근심우환 온갖 고초를 겪으시다가

중년도 못 미쳐 객지 여관에서 생을 마치셨으니

하늘이여 하늘이여 이것이 무슨 일인가요

하늘이 베풀고 보답하심이 아득도 하여 그 법도를 오랫동안 잃었으니

이 또한 반드시 깊이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악착같이 이 세상에서 장차 이 사람을 다시 보지 못하오니

내가 곡하는 바가 비록 애통해하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후기의 학자 강재 송치규(剛齋 宋穉圭 1759~1838)선생이 찬한 김진사 정렴에게 올리는 제문(祭金進士正廉文)에서 발췌를 하였는데 제문의 내용으로 보아 김진사는 훌륭한 분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아서 김진사 정렴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전해지는 자료가 거의 없고 필자가 찾은 것은 김진사 정렴은 발췌제문에 과옹(김정묵)의 재종제로 본명은 김효직(金孝直)이고 고종 5년 무진(1868)년에 이조 참의로 추증하였다는 자료만 얻는데 그쳐 안타깝다 다만 제문에 과옹은 김정묵(金正默1739 ~ 1799)선생이라고 하니 정묵 선생을 알면 그 재종제 진사 김정렴선생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한다

 

김정묵(金正默1739 ~ 1799)선생은 본관은 광산(光山) 초명은 김두묵(金斗默) 자는 이운(而運) 호는 과재(過齋) 김장생(金長生)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김위재(金偉材)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로 참봉 휴경(休耕)의 딸이며 재당숙인 기재(驥材)에게 입양되었고 양어머니는 진주유씨(晉州柳氏)로 전적(典籍) 유상휘(柳尙徽)의 딸이고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업에도 충실하였으며 능히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도 있었으나 할아버지 김운택(金雲澤)이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벼슬에서 물러난 것을 보고 벼슬하기를 꺼려 학문에만 힘쓰다가 정조 4(1780) 감사의 추천으로 돈녕부참봉(敦寧府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경연서연관(經筵書筵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그 때 족친인 김하재(金夏材)의 역변(逆變)이 있었으므로 끝내 사퇴하였으며 선생은 경전 외에도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론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성리학과 예설(禮說)에 밝았으며 남당집(南塘集) 중 심성(心性) 이기(理氣) 예설 등에 관한 한원진(韓元震)의 논술이 이이(李珥) 송시열(宋時烈)의 본 뜻에 많이 위배됨을 지적 고증을 들어 변증하는 규도수록(圭刀隨錄)을 저술하고 저서로는 과재유고(過齋遺稿) 115책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초가집에서 가난하게 살다 또는 순탄치 못한 삶으로 숨어서 살다 라는 의미인 오늘의 성어 감가봉문(坎坷蓬門)의 어려운 지경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학문에 전념하며 꿋꿋이 학자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신 김정묵 정렴 두 선생의 진정한 선비정신을 감명 깊게 받아드리며 또한 그것을 실천 실행하신 큰 뜻을 존숭하며 살아가는 길에 지표로서 삼기위해 감가봉문(坎坷蓬門)을 휘호하고 백운필담에 담아 놓는다

 

桓紀 9217(경자)1228일 저녁에 白雲仙士 金大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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