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첨망의범 瞻望懿範

백운선사 김대현 2021. 2. 15. 14:08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첨망의범 瞻望懿範

볼 첨바랄 망아름다울 의법 범

 

아름답고 훌륭한 본보기를 아득히 바라보다

 

이 성어는 조선 중기의 학자 월천 조목(月川 趙穆 1524~1606)선생의 시문집인 월천집(月川集)에 문하생 김택룡선생이 쓴 제문(祭文 門下生金澤龍)에서 발췌하다

 

樑木其摧 天柱遽折 량목기최 천주거절

士子安仰 吾儕疇依 사자안앙 오제주의

虎逝龍亡 益傷今日 호서룡망 익상금일

顧余小子 卯角趨隅 고여소자 묘각추우

猥蒙提撕 擊我矇瞶 외몽제시 격아몽귀

指南冥道 觸迷知方 지남명도 촉미지방

恩同我生 視之猶子 은동아생 시지유자

俯收象棄 情義綢繆 부수상기 정의주무

仰止芙蓉 瞻望懿範 앙지부용 첨망의범

方期畢業 以收桑楡 방기필업 이수상유

天不憖遺 籲呼無及 천불은유 유호무급

白首奚託 有淚泉懸 백수해탁 유루천현

德宇難回 音容綿貌 덕우난회 음용면모

宇宙空闊 視天茫茫 우주공활 시천망망

銜此哀誠 敬奠一酌 함차애성 경전일작

神鑑未昧 庶幾右之 신감미매 서기우지

已矣已矣 哀哉哀哉 이의이의 애재애재

 

집안의 대들보가 그렇게 부러지고 하늘의 기둥이 갑자기 꺾어지니

선비들은 어디를 우러러 보며 우리들 모두 함께 누구를 의지하랴

든든한 범이 떠나고 용도 사라졌으니 오늘따라 더욱 더 마음 아프도다

돌아보건대 내가 어린나이에 철이 없던 시절 어르신들 가르침을 받아

외람스럽게도 이끌어 주는 은혜를 입어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시고

어두운 길에 지남철 나침판이 되어서 미로를 헤맬 때 방향을 알려주시어

그 크신 은혜는 나를 낳아준 것과 같아 마치 자식처럼 그렇게 보살펴주시고

버려지다시피 한 이 몰골을 굽어 거둬주시니 따뜻한 의리가 꼼꼼도 하셨으니

훌륭하신 인품으로 벼슬아치도 우러르고 아름다운 본보기로 아득히 쳐다보며

바야흐로 학업을 마치기를 기약하고 석양이 지는 만년에 주워 보려하였지만

하늘이 억지로 선생을 남겨 두지 않고 부르짖고 불러도 미치지를 못하나니

흰머리 백발의 이 몸은 어디에 의탁할까 눈물이 샘물처럼 매달려 흐르네

덕성이 있는 큰 성품을 되돌리기도 어렵고 음성과 모습도 아득하기만 하고

무한한 우주가 넓고 넓어 공활하니 하늘을 바라봐도 한이 없이 망망하네

이 슬프고 애통한 정성을 가슴에 가지고 한 잔의 술을 공경히 올리옵고

신께서 살피시어 어둡지 않으시다면 거의 가까이에서 도와주시길 바라나니

이미 끝이 나고 벌써 끝이 났습니다 슬프고 애닯퍼라 슬프고도 애닯퍼라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중기의 학자 월천 조목(月川 趙穆 1524~1606)선생의 문하생인 김택룡선생이 월천선생의 기일에 쓴 제문에서 발췌를 하였는데 김택룡(金澤龍 1547~1627)선생은 본관은 의성 자는 시보(施普) 호는 와운자(臥雲子) 아버지는 참봉 김양진(金楊震)이며 선조 9(1576)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이어 참봉을 거쳐 선조 21(1588)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문학을 역임하였으며 선조 28(1595)년 병조좌랑이 되고 이어 선조 앞에서 주역을 강의하였으며 같은 해 헌납 직강을 거쳐 이듬해 지평 겸사서를 역임하고 전라도 광양 운봉에서 적을 무찌른 공으로 공적이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선조 33(1600)년 전적을 거쳐 강원도도사 전라도도사 등을 역임하고 이황의 문인 조목에게서 배웠는데 이황의 문하생들과도 교유하며 이황과 이이의 학문을 발전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월천 조목(月川 趙穆 1524~1606)선생은 경북예안 출신이며 본관은 횡성 자는 사경(士敬) 아버지는 참판 조대춘(趙大春)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권수익(權受益)의 딸이고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명종 7(1552)년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를 포기하고 학문과 수양에만 전념하였지만 1566년 공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황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경전 연구에 주력하다가 이후 성균관수천 집경전참봉 동몽교관 종부시주부 조지서사지 공조좌랑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며 선조 9(1576)년 봉화현감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냈으나 허락되지 않아 봉직하면서 향교를 중수하고 1580년 이후 전라도도사 장원서장원 등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며 1594년 군자감주부로 잠시 있으면서 일본과의 강화를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이후 공조참판 등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재덕과 노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내고 사퇴하였으며 선생은 일찍이 이황의 문하생이 된 후 평생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이황을 모신 팔고제의 한 사람으로 선생의 문집에는 이황에 관계된 글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주된 업적은 이황에 대한 연구와 소개이며 이황이 세상을 떠난 뒤 문집의 편간 사원의 건립 및 봉안 등에 힘썼으며 사후 도산서원 상덕사의 유일한 배향자가 되었으며 선생은 신민(新民)보다 명덕(明德)을 중시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경학을 연구하되 이기설보다는 훈고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심학(心學)에 심취하여 심경(心經)에 관한 논설이 많고 평생을 청빈하게 지내면서 온후하고 겸양하며 독실한 실천을 지향하였으며 제자로는 김중청 이광윤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월천집과 곤지잡록이 있고 예천의 정산서원 예안의 도산서원 봉화의 문암서원등에 제향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아름답고 훌륭한 본보기를 아득히 바라보다 라는 의미인 첨망의범(瞻望懿範)을 오늘의 성어로 발췌하면서 어떤 일에 있어서나 어려운 일 상황에 처하더라도 바라보고 본보기로 삼을 법도가 있다면 닥친 일을 쉽게 풀어 갈 수 있듯이 살아가는 삶에서도 고통과 역경을 참고 꾸준히 그 해결점을 찾아서 풀어나간 실마리들을 기록해 두면 그것 또한 아름다운 본보기 의범(懿範)이 된다는 지극한 진리에 오늘도 붓 들고 휘호하고 백운필담에 담는다

 

桓紀 9218(신축)14일 오후에 白雲仙士 金大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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