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담피증서 覃被烝庶

백운선사 김대현 2021. 2. 16. 13:51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담피증서 覃被烝庶

미칠 담이불 피찔 증여러 서

 

여러 사람(국민)들에게 널리 미치다

 

이 성어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청백리인 도곡 이의현(陶谷 李宜顯1669~1745)선생의 시문집 도곡집(陶谷集) 권팔(卷八) 응제록(應製錄)에 종친부에서 대행왕비전에 진향할 때의 제문(大行王妃殿宗親府進香祭文)에서 발췌하다

 

率禮蹈謙 施仁布恕 솔례도겸 시인포서

德稱紞綖 衣澣絺紵 덕칭담연 의한치저

貫魚以寵 虗儲軫慮 관어이총 허저진려

中罹否運 簡以知阻 중리부운 간이지조

小心苦身 屢更寒暑 소심고신 루경한서

率土晦瞢 沉痛其茹 솔토회몽 침통기여

天道循環 夫孰能禦 천도순환 부숙능어

聖心祗悔 如日初曙 성심지회 여일초서

二儀再奠 六騩重馭 이의재전 륙귀중어

懿烈增光 彝倫攸叙 의렬증광 이륜유서

邦家大慶 千古罕覷 방가대경 천고한처

協氣旁流 神人樂胥 협기방류 신인악서

太廟執笲 盛禮肇擧 태묘집변 성례조거

顧復春邸 則順以豫 고부춘저 칙순이예

中闈旣正 萬品得所 중위기정 만품득소

云胡寢疾 奄棄匕箸 운호침질 엄기비저

精淪桂魄 祲纏椒籞 정륜계백 침전초어

御極無幾 乘雲斯遽 어극무기 승운사거

理難人詰 善莫天與 리난인힐 선막천여

末命惓惓 浮費之去 말명권권 부비지거

先旨宜遵 民力可紓 선지의준 민력가서

湛恩篤惠 覃被烝庶 담은독혜 담피증서

 

예절을 따르고 겸양을 실행하며 어질게 행하시고 용서로서 베푸시니

덕스럽고 사치하지 않음을 칭찬하고 거친 갈포모시옷을 빨아 입으시며

물고기를 꿰듯 연이어 총애를 받으나 태자가 없어 몹시 애를 태우셨으니

중간에 아닌 운을 만나 곤란을 겪고 대쪽 같은 글로써 막힘을 아셨습니다

조심하며 주의하고 몸도 고생하시며 몇 해를 추위와 더위로 보내시고

온천하가 캄캄한 어둠에 빠지니 그 품은 마음이 침통에 빠졌었지만

하늘의 길 천도는 순환하므로 대저 그 누가 능히 막을 수 있겠습니까

성스런 임금께서 마침 후회하시매 마치 첫 새벽에 해가 떠오르는 듯이

하늘과 땅 이의가 다시 정해짐에 여섯 필의 담흑색 황후의 말을 다시 부리며

아름답고 훌륭한 위엄이 빛을 더하여 떳떳한 윤리가 차례대로 다스려지고

온 나라의 크나 큰 경사로서 아주 오랜 세월의 역사에 드문 일이었습니다

화합한 기운이 두루 널리 흘러 퍼지니 하나님과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하며

태묘에 황후묘현례(폐백)를 행하여 성대한 예를 비로소 처음 거행했습니다

황제의 태자를 돌아보고 또 돌보시니 태자는 순종하고 즐거워하며

궁중에 황후가 이미 바르게 되니 모든 사물이 걸맞은 자리를 얻었습니다만

어찌하여 병석으로 자리에 드러누우셔서 문득 수저를 버리신단 말입니까

면밀한 정기가 달무리에 잠기어 요사한 기운이 향기로운 궁중을 감싸면서

황후의 자리에 오르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 그리도 빨리 구름타고 하늘로 오르셨습니까

이런 이치는 인간이 꾸짖기는 어렵지만 선하신 하나님이 거들떠 주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명을 간절히 곡진하게 내리시니 쓸데없는 낭비를 없애라는 것이었으며

선대의 훌륭한 뜻을 마땅히 따라야만 백성의 힘이 넉넉하고 여유 있다고 하셨으니

깊고 깊은 은총과 도타운 은혜는 저 많은 백성들에게 널리 입히고 미치었습니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청백리인 도곡 이의현선생이 찬한 조정 종친부에서 대행왕비전에 진향할 때의 제문중에서 발췌하였는데 대행왕비는 바로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로 시호를 받기 전에 호칭이며 왕후 민()씨는 본관은 여흥이고 아버지는 여양부원군 민유중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로 송준길의 딸이시며 숙종 7(1681) 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으며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서 만백성의 추앙을 받았으나 왕자를 낳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잃게 되었는데 그때 장소의에게서 왕자 이윤(경종)이 출생하자 숙종의 총애는 장소의에게 쏠리게 되어 1689년에 숙종이 왕자 이윤을 원자로 봉하고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송시열 등 노론파 인사들이 소를 올려 이에 반대함으로써 숙종과 심하게 대립하였으나 숙종은 이들을 면직 사사시키고 이현기 남치훈 등 남인들을 등용하는 이른바 기사환국이 일어났으며 지위가 오른 희빈 장씨의 간계로 폐서인이 되어 안국동 본댁 감고당에서 지내다가 그 뒤 숙종이 폐비에 대한 처사를 후회하고 있던 중에 1694년 노론파의 김춘택과 소론파의 한중혁 등이 폐비복위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저해하려는 남인 민암 김덕원 권대운 등을 유배 보내고 사사시키는 갑술옥사를 거쳐 다시 복위되었으며 그 뒤 덕을 베풀고 희빈 장씨와 화기를 도모하면서 살았으나 원인모를 질병으로 1701년에 3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한 궁녀가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쓴 소설 인현왕후전이 전하며 시호는 효경숙성장순의열정목인현왕후(孝敬淑聖莊純懿烈貞穆仁顯王后)이고 능호는 명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 서오릉묘역 내에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여러 사람(국민)들에게 널리 미치다 라는 위미의 담피증서(覃被烝庶)의 발췌문을 읽으면서 문장의 어휘가 깍듯이 황후의 예에 준하기에 조선이라는 나라는 제후국인가 아님 황제국인가 홀로 의아스럽게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단 하루를 살더라도 담피증서는 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옳은 삶이 아닐까 정리하며 백운필담에 담고 휘호로 남긴다

 

桓紀 9218(신축)15일 오후에 白雲仙士 金大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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