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지려주상 智慮周詳

백운선사 김대현 2021. 3. 2. 16:08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지려주상 智慮周詳

슬기 지생각할 려두루 주자세할 상

 

슬기와 생각이 두루 치밀하다

 

이 성어는 조선 중기 현종 때의 문신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 1629~1689)선생의 시문집인 문곡집(文谷集) 권십구(卷十九)에 우의정 완남부원군 이공 묘지명 병서(右議政完南府院君李公墓誌銘 幷序)에서 발췌하다

 

癸未 特陞漢城右尹 封完南君 계미 특승한성우윤 봉완남군

移諫長 拜江都留守 이간장 배강도류수

三年 遞爲戶曹參判 大司憲 忤旨遞 삼년 체위호조참판 대사헌 오지체

明年 除刑曹參判 與會盟宴 陞嘉義 명년 제형조참판 여회맹연 승가의

以副价修聘虜庭 이부개수빙로정

歷都承旨 兵曹參判 兩司長官 력도승지 병조참판 량사장관

以安胎使使湖西還 爲咸鏡監司 이안태사사호서환 위함경감사

孝廟嗣位 入拜刑曹參判 효묘사위 입배형조참판

屢遷不出舊踐 轉大司成兼同知春秋 루천불출구천 전대사성겸동지춘추

與修仁祖實錄 兼承文院提調 여수인조실록 겸승문원제조

特陞資憲 儐北使疏辭 특승자헌 빈북사소사

聖批 卿才敏捷 성비 경재민첩

智慮周詳 允宜寵擢 지려주상 윤의총탁

拜判尹 刑曹工曹判書 배판윤 형조공조판서

兼帶經筵金吾 三爲憲長 겸대경연금오 삼위헌장

壬辰 戶曹判書 以鞫獄勞加一階 임진 호조판서 이국옥로가일계

兼世子賓客 病免 겸세자빈객 병면

上對近侍問公疾 상대근시문공질

仍曰 此人盡心國事 惜其病也 잉왈 차인진심국사 석기병야

再長憲府 改判尹禮書 재장헌부 개판윤례서

 

계미 인조21(1643)에 특별히 한성부 우윤으로 승진했고 완남군에 봉해지고

대사간으로 이동하였으며 강도 유수의 벼슬을 받았다

3년이 지나 인사이동으로 호조 참판 대사헌이 되었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이동되었다

이듬해 형조 참판에 제수되고 회맹연에 함께했으며 가의대부로 승진되어

부개(부사)로 나라를 위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도승지 병조참판 양사 장관을 지냈으며

안태사로 부임받아 호서에 갔다가 돌아와 함경 감사가 되었다

효종께서 왕위를 잇자 조정에 들어가 형조 참판에 제배되고

여러 차례 이동하면서 이전 관직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대사성 겸 동지춘추관사로 옮겨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승문원 제조를 겸하였다

자헌대부로 특진하여 북쪽 사신을 맞이하는 접빈사가 되자 사직 상소를 하였는데

성상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경은 재주가 민첩하고

슬기와 생각이 두루 치밀하니 참으로 총애하고 뽑아야 마땅하다 라고 하였다

판윤 및 형조와 공조 판서에 제배되고

경연과 임금의 명을 받들어 의금부(금오)의 관직을 겸대했으며 세 번 대사헌이 되었다

임진 효종3(1652)에 호조 판서로서 옥사를 국문한 공로로 한 계급 더해지고

세자 빈객을 겸임하다가 병으로 면직되었다

상이 사관에게 공의 질병을 묻고

이어서 말씀하길 이 사람은 나랏일에 온 마음을 다했는데 그 병이 애석하다 했다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한성 판윤 예조 판서로 바뀌었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중후기 예조판서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영평의 옥병서원(玉屛書院)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전주의 호산사(湖山祠)에 제향되시고 저서로는 문곡집(文谷集)남기시고 시호는 문충(文忠)공 이신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 1629~1689)선생이 찬한 우재 이후원(迂齋 李厚源 1598~1660)선생의 묘지명인 우의정 완남부원군 이공 묘지명 병서(右議政完南府院君李公墓誌銘 幷序)인데 우재 이후원선생은 본관은 전주 자는 사심(士深) 호는 우재 외 남항거사(南港居士) 아버지는 군수 욱()이고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며 1623년 인조반정에 참가해 정사공신 3등으로 완남군에 봉해지고 태인현감이 되었으며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출전하였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총융사가 되었으며 1635년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지평을 지냈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론을 극력 반대하고 청과의 강화과정에서 세자를 인질로 보내서는 안 된다고 극간하는 등 척사론을 펼쳤으며 효종이 즉위한 후 북벌계획에 앞장섰으며 1650(효종 1) 김자점이 효종의 북벌계획을 청에 밀고하자 그의 죄를 논해 부처하도록 했으며 1653년 도승지로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655년 예조판서로서 추쇄도감의 제조가 되어 전국의 노비를 추쇄해 강화를 방비하게 했으며 장악원에 소장되어 있던 악학궤범(樂學軌範)을 다시 간행해 사고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였으며 이듬해 이조판서로 있을 때는 청탁하는 사람이 집에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등 공정한 인사에 힘썼으며 1657년 우의정이 되고 1659년 자의대비(慈儀大妃) 복제문제가 일어나자 송시열과 함께 기년복을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사후 광주 수곡서원에 제향되고 시호는 충정(忠貞)공이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슬기와 생각이 두루 치밀하다 라는 의미인 오늘의 지려주상(智慮周詳)을 발췌하면서 누구나 어떤 일에 처하든 차분하게 슬기와 생각을 두루두루 치밀하게 세워 학업이든 사업이든 각 개인 사회 직장 나라 모든 일에 있어서 흔들림 없이 대처하고 시행하여 나간다면 세상만사가 평화롭게 되리라 믿으며 우재선생의 행장을 읽고 효종임금이 친히 선생을 지려주상 윤의총탁(智慮周詳 允宜寵擢) 슬기와 생각이 두루 치밀하니 참으로 총애하고 뽑아야 마땅하다이라 높이 평가하신 말씀에 감동하며 지려주상을 휘호하고 성어문집 백운필담에 담는다

 

桓紀 9218(신축)119일 오후에 白雲仙士 金大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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