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질각정명 質愨精明

백운선사 김대현 2021. 3. 3. 17:55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질각정명 質愨精明

바탕 질성실할 각쓿은 쌀 정밝을 명

 

인간 본연 그대로 성실하고 세세하며 분명하다

 

이 성어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성리학자 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셨던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1606~1672)선생의 시문집인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 9(卷九)에 묘지문 송시열찬(墓誌文 宋時烈)에서 발췌하다

 

公得力最在心經 近思諸書 공득력최재심경 근사제서

一切沿溯於洛閩之淵源 일절연소어락민지연원

而又於先儒最慕延平之質愨精明 이우어선유최모연평지질각정명

常以不得祀於聖廟爲慊 상이불득사어성묘위겸

於本朝 則以李文純公滉 爲終身師法之地 어본조 즉이리문순공황 위종신사법지지

故卒逝之年 有夢見之作 고졸서지년 유몽견지작

豈精神感通而然歟 기정신감통이연여

於此可見公之心志氣象之大槩也 어차가견공지심지기상지대개야

然遇事正義 不顧利害 연우사정의 불고리해

則又有賁育不可奪之節 칙우유분육불가탈지절

故或失君上之志 고혹실군상지지

而一番人仇 嫉亦已極矣 이일번인구 질역이극의

豈其溫厚和平之中 기기온후화평지중

自有正直剛大之氣耶 자유정직강대지기야

噫 以公之學之德 宜爲百世之宗師 희 이공지학지덕 의위백세지종사

而墓草再宿 禮訟仍爲禍阱 이묘초재숙 례송잉위화정

追謫之律 遽加於泉壤 추적지률 거가어천양

而孝廟之盛德至善 亦爲之剝蝕 이효묘지성덕지선 역위지박식

豈不痛哉 기불통재

 

공이 가장 큰 힘을 얻은 것은 각종 경전에서 뽑은 격언서인 심경과 근사록 등에 있는데

하나같이 모두가 낙민(송의 정호 정이학파와 주희학파)의 연원에서 거슬러 흘러나왔고

또 앞선 유학자 중에 연평 이통(延平 李侗10931163:주희의 선생)의 인간 본연 그대로 성실하고 세세하며 분명함을 가장 많이 사모하여

항상 성묘에 종사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하였으며

우리 조선에는 문순공 이황선생을 평생 죽을 때까지 스승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돌아가시던 해에 꿈에 퇴계 선생을 만나 뵙고 시를 지은 일이 있으니

어찌 정신이 감동하여 통하였으니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공의 심지와 기상의 대략을 가히 볼 수 있다

그러하나 일을 만났는데 정의이면 이해를 돌아보지 아니하였고

또 용맹한 맹분 하육 같은 용사가 있더라도 가히 빼앗을 수 없는 절개를 가졌으니

그런고로 혹 군상의 뜻도 잃기도 하고

한쪽 사람들이 원수같이 내다보고 지극히 미워하기도 하였으니

어찌 온후하고 화평한 속에서도

스스로 정직하고 강대한 기운이 있었음이 아니겠는가

아 공의 학문과 덕행은 마땅히 백세의 종사가 됨인데

무덤에 묻힌 지 2년 만에 예송에 관한 논란이 이내 화근의 함정이 되어

추적(죽은 사람에게 주는 형벌)의 형률이 갑자기 황천에까지 더해져

효종의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에 이르기까지 역시 이로 인해 벗겨지고 손상되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아니하겠는가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조 중후기 양송(兩宋)이라 칭하는 성리 학자이자 정치가인 송시열(宋時烈 1607~1689)선생이 찬한 선생과 종친이면서 양송의 또 한분인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1606~1672)선생의 묘지문에서 발췌를 하였는데 동춘당선생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성리학자 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였으며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고 노론 소론이 분당되기 전에 사망하였으나 사실상 그가 이끌던 문인들은 그의 사후 노론을 형성하였으며 송시열과 함께 북벌론을 주장하고 제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과 함께 주자의 성리학과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 때 기년복 설을 주장하였으며 일찍부터 김장생과 그 아들 김집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24(인조 3) 진사로서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김장생과 김집의 문하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다가 인조 때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보고 그들을 동정하였고 소현세자 사후에게는 세자의 아들에게 계승권이 돌아가야 된다고 주장하다가 인조의 눈밖에 났으며 그 뒤 학문 연구에 정진하다 1649년 효종 즉위 직후 스승 김집의 천거로 발탁되어 청요직을 역임한 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 김수항과 함께 서인논객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때 서인 온건파를 이끌며 남인에 대한 강경 처벌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으며 윤선도의 상소 이후 한때 윤선도의 구명운동을 펴기도 하였으며 당색은 서인(西人)으로 율곡 이이를 사숙하였고 김장생 김집의 문하생이며 장인이기도 한 남인학자 정경세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그를 사표로 받들이기도 하고 친척인 우암 송시열과 함께 양송으로도 불렸으며 사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위키백과 참조]

 

인간 본연 그대로 성실하고 세세하며 분명하다 라는 의미인 오늘의 성어 질각정명(質愨精明)의 발췌문을 읽고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며 나라와 민족과 나 자신에 대한 처세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옳은 일인가를 되짚어 보며 조선은 명을 섬기면서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섰지만 청을 오랑캐라 하여 배척을 한 값으로 혹독하게 당하면서 결국 조선의 선비들은 양파로 갈라지면서 당파싸움으로 종국에는 나라가 피폐하여 일본에 침탈을 당한 쓰라린 경험이 체가시기도 전에 이 남쪽은 또 갈기갈기 도리어 친일자존세력이 큰소리치고 나라를 좌우지 하는 웃지 못 할 세상이 오늘의 형국이지만 그러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정의로운 나라를 위해 질각정명(質愨精明)의 본질을 세세하게 살펴서 삼성조의 후예로서 부끄럽지 않은 자손이 되기 위해 홀로서라도 바른 소리로 노래하며 붓 들고 휘호하고 백운필담에 담는다

 

桓紀 9218(신축)120일 오후에 白雲仙士 金大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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