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오지류찬 忤旨流竄

백운선사 김대현 2021. 3. 25. 13:56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오지류찬 忤旨流竄

거스를 오맛있을 지흐를 류숨을 찬

 

입맛에 거슬리어 멀리 쫓겨나다 즉 임금의 뜻에 거슬러서 류찬(귀양)의 형벌을 받다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인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1607~1689)선생의 시문집 송자대전(宋子大全) 권일백삼십팔(卷一百三十八)에 시남집서(市南集序)에서 발췌하다

 

孝廟初服 忤旨流竄 효묘초복 오지류찬

仍復退處 八九年之間 잉부퇴처 팔구년지간

所以危深增益 理明而義精者 소이위심증익 리명이의정자

又非前日之比也 우비전일지비야

及其末年 際遇昭融 급기말년 제우소융

取以自近 而處之以機要 취이자근 이처지이기요

公亦以世道自任 知無不言 공역이세도자임 지무불언

必竭底蘊 世方期其有爲 而孝廟上賓矣 필갈저온 세방기기유위 이효묘상빈의

公送往事居 方物謀慮 공송왕사거 방물모려

罄其忠益 以死爲期 而公則病矣 경기충익 이사위기 이공즉병의

蓋其五六七歲間 見於章疏謨猷之中者 개기오륙칠세간 견어장소모유지중자

綱條甚正 義理甚明 旣非迂闊之陳談 강조심정 의리심명기비우활지진담

而又非功利之卑論也 이우비공리지비론야

雖其人心不如我心 做時不似說時 수기인심불여아심 주시불사설시

不能皆底於績 而不害其爲皆可績矣 불능개저어적 이불해기위개가적의

 

효종임금 왕위에 오른 초창기에 임금의 뜻에 거슬리어 유찬의 형벌을 받아

거듭 또다시 유배지로 물러났었다 팔구년의 세월을 지내는 동안에

매우 위태로운 것은 더욱 보충하고 이치가 밝고 의리가 정밀하여진 것이

또 지난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효종임금 말년에 임금과의 사이에 뜻이 밝게 잘 융화되어

임금이 공을 뽑아 불러다 가까이에 두고서 중요한 직책에 앉히니

공 역시 세도를 스스로 책임지고 맡아 아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없고

반드시 조금도 숨김없고 세상이 바야흐로 큰일을 할 만하다 기대할 때 효종임금이 승하하였다

공은 승하하신 임금을 장사 지내고 새 임금을 섬기면서 바야흐로 사물의 계략을 짜내서

그 충성을 모두 다할 것을 죽기로써 기약하였으나 공은 즉 병환이 들었다

생각건대 오륙 칠년 사이에 걸쳐 상소 장에 국가의 큰 계책을 논의하는 그 중심을 보면

벼리(뼈대)와 가지가 매우 바르고 의리도 매우 밝아서 이미 멍청하게 실속 없는 설도 아니고

또는 공적과 이익에 얽힌 저속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비록 사람의 마음이 내 마음 같지 못하고 일을 할 때가 말을 할 때 같지 않아서

능히 모두 공적을 이루지는 못하였더라도 그 모두가 가히 공적이 되는 데에는 흠이 없었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인 우암 송시열선생이 쓴 시남 유계(市南 兪棨1607~1664)선생의 시문집인 시남집서(市南集序)문의 일부분이다

 

시남 유계선생은 본관은 기계 자는 무중(武仲) 아버지는 참봉 유양증(兪養曾)이며 어머니는 의령남씨로 병조참판 이신(以信)의 딸이고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며 예학과 사학에 정통하였으며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이유태등과 더불어 충청도 유림의 오현으로 일컬어졌다 인조 8(1630) 진사과에 합격하고 163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리로 벼슬을 시작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시강원설서로서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척화죄로 임천에 유배되었으며 1639년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금산의 마하산에 서실을 짓고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는데 이때 가례집해를 개작하여 가례원류를 저작하였으며 1644년 주서로 기용되었고 1646년 무안현감 1649년 인조가 죽자 홍문관부교리로서 왕의 장례 절차를 상소하여 예론에 따라 제도화하였으나 인조의 묘호를 정할 때 조()자의 사용을 반대하고 종()자를 주장하다가 이듬해 선왕을 욕되게 하였다는 죄로 온성과 영월에 유배되었으며 1652(효종 3) 유배에서 풀려나 송시열 송준길 등의 추천으로 시강원문학으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1659년 병조참지로서 비변사부제조를 겸임하고 이어서 대사간 공조참의 대사성 부제학 부승지 등을 지내고 이 해에 효종이 죽고 복상 문제가 일어나자 서인으로서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하였으며 3년설을 주장한 윤휴 윤선도등의 남인을 논박하여 유배 또는 좌천시켰으며 현종 3(1662) 예문관제학을 거쳐 1663년 대사헌 이조참판에 올랐다가 병으로 사직하였으며 선생은 이이와 김장생의 학통을 계승하였고 예론의 입장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의 전위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이이의 동호문답을 본받아 고금의 치도를 논하고 자신의 정치사상을 피력한 강거문답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에서 이이의 학설을 요약하여 정치의 근본은 수기(修己)이고 정치의 핵심은 임관(任官)이며 정치의 급무는 구민(救民)이다 라고 보고 그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하였으며 또한 주자의 가례를 기본으로 하고 의례 주례 대례 등 여러 경전의 내용을 뽑고 주를 붙여 원()이라 하며 후대의 여러 유학자들의 예설을 조사하여 유()라 하여 역사상의 예설들을 밝힌 가례원류를 편찬하였는데 이는 김장생의 예설에 토대를 둔 것이며, 훗날 윤선거와 공편했는지를 두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치열한 당쟁의 시발이 되고 말년에는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을 본받아 노론 정권하의 고려사에 대한 역사관을 대변해 주는 강목체의 여사제강을 편찬하였으며 그 밖의 저서로는 문집인 시남집(市南集)이 있고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임천의 칠산서원 무안의 송림서원 온성의 충곡서원 등에 제향되셨고 시호는 문충(文忠)공이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입맛에 거슬리어 멀리 쫓겨나다 즉 임금의 뜻에 거슬러서 류찬(귀양)의 형벌을 받다 라는 의미인 오지류찬(忤旨流竄) 오늘의 성어발췌문을 읽으면서 참으로 늦었지만 우리 선현들의 문집 속에 좋은 말 성어를 탐구 탐색하는 여행을 참 잘 했다싶다 비록 어눌한 성어풀이 일지라도 평소에 알지 못했던 선현들을 알게 될 때마다 또 오묘한 글 멋진 성어를 찾았을 때의 그 순간의 보람을 말로 표현하면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해 오지유찬을 떠나더라도 하나도 섭섭하거나 아쉽지 않다 라고 정리하며 성어문집 백운필담에 담고 휘호로 남긴다

 

桓紀 9218(신축)213일 오후에 白雲仙士 金大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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