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지증괴탄 秖增愧歎

백운선사 김대현 2021. 3. 26. 16:25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지증괴탄 秖增愧歎

마침 지불을 증부끄러워할 괴읊을 탄

 

다만 더 부끄럽고 한탄스럽다

 

이 성어는 조선 중기 문신이자 대학자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선생의 시문집 한강선생문집(寒岡先生文集) 권오(卷五)에 권신초 종윤에게 답함(答權愼初 終允)에서 발췌하다

 

遠發專使 惠書貺問 원발전사 혜서황문

意已厚矣 詞亦切矣 의이후의 사역절의

翫復感荷 無以爲喩 완부감하 무이위유

就審秋淸文會有相 취심추청문회유상

雅履佳勝 益深欣慰之至 아리가승 익심흔위지지

僕衰病昏悴 僅扶殘骸 복쇠병혼췌 근부잔해

而近緣感冒初寒 痛楚沈呻 이근연감모초한 통초침신

益復憒憒 無足言 익부궤궤 무족언

前來禮書 전래례서

深服撰次有序 門類頗精 심복찬차유서 문류파정

非左右諸賢好禮之誠 致意之詳 비좌우제현호례지성 치의지상

何以如是 하이여시

時一覽閱 慰喜無已 시일람열 위희무이

更擬勘定 俾爲完書 갱의감정 비위완서

以副諸賢愛慕先正之盛意 이부제현애모선정지성의

而收拾餘燼 重緝五先生禮說 이수습여신 중집오선생례설

功未究竟 力不他及 공미구경 력불타급

姑置巾衍 秖增愧歎 고치건연 지증괴탄

 

멀리 인편으로 전해 준 은혜로운 편지로써 위문하여 주시니

그 뜻이 이미 후하고 말씀 또한 간절하시어

가지고 읽고 또 읽어보니 그 감사함이 비유할 수가 없었는데

맑은 가을 날씨에 학문을 하는 모임에서 서로 도와주시어

요즘 형편이 좋다는 것을 살피고 나니 더하여 더욱 기쁘고 위안이 됩니다

저는 늙고 병은 깊어지고 혼미하며 시들어서 겨우 쇠잔한 몸 떠받치고 있습니다

요즘 첫추위에 감기가 들어 통증이 매우 아파 심하게 신음하다보니

더욱 마음이 산란하고 어수선한 것 말고는 족히 할 말이 없습니다

지난번에 보내온 예법에 관한 책엔

문장을 배열한 차례가 질서가 있고 부문별로 나눈 것이 매우 정밀하여 엄청 감복하였습니다

좌우의 여러 제현들이 예법를 좋아하는 정성과 세밀한 뜻을 이루지 않았으면

어찌 이와 같이 되겠습니까

가끔 한 번씩 뒤적거려 볼 때 위로되고 기쁘기가 그지없습니다

다시 더 헤아리고 감수하고 교정하여 더 완전한 책이 되게 함으로써

제현들께서 앞선 선현들을 사랑하고 흠모하는 성대한 뜻을 따르려고

불에 타다 남은 책들을 수습하여 오선생예설을 다시 편집하는데

그 일이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아 힘이 다른 데에 미칠 수가 없습니다만

우선은 책장 속에 놓아두고 있으니 다만 더욱 부끄럽고 한탄스러울 뿐입니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대학자인 한강 정구선생이 권호문선생의 문인으로 유성룡등과 교유한 유학자 권종윤(權終允)선생에게 답한 편지글에서 발췌하다

 

권종윤선생에 대한 자료는 찾지를 못하고 한강 정구선생은 본관은 청주 자는 도가(道可) 아버지는 김굉필의 외증손으로 충좌위 부사맹 정사중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로 이환의 딸이시며 6대조 정총(鄭摠)과 그 아우인 정탁(鄭擢)이 개국공신에 책봉되는 등 본래 공신가문으로 대체로 한양에서 살았으나 부친이 성주이씨와 혼인하면서 성주에 정착하여 둘째 형인 정곤수(鄭崑壽)는 문과에 급제해 병 형조 참판 의정부좌찬성 등 주요 관직을 지낸 관리로서 생후 5세에 이미 신동으로 불렸으며 10세에 대학과 논어의 대의를 이해하였으며 13세인 1555년 성주향교 교수인 오건(吳健)에게 역학을 배웠는데 건 곤 두 괘만 배우고 나머지 괘는 유추해 스스로 깨달았다 전하며 1563년에 이황을 1566년에 조식을 찾아뵙고 스승으로 삼았으며 그 무렵 성운을 찾아뵙기도 하였으며 1563년 향시에 합격했으나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선조 6(1573) 김우옹(金宇顒)이 추천해 예빈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는 등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되어도 사양하다가 1580년 비로소 창녕현감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584년 동복현감을 거쳐 이듬해 교정청낭청으로 소학언해 사서언해 등의 교정에 참여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천군수로 재직하면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고 1593년 선조의 형인 하릉군(河陵君)의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낸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 우부승지 장례원판결사 강원도관찰사 형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전체적으로 중앙 관직보다는 지방의 수령으로 더 많이 활약하였으며 1603년 남명집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정인홍이 이황과 이언적을 배척하자 그와 절교하였으며 1608(광해군 즉위년) 임해군의 역모사건이 있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라는 소를 올리고 대사헌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였으며 1613년 계축옥사때 영창대군을 구하려 했으며 1617년 폐모론 때에도 인목대비를 서인으로서 쫓아내지 말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만년에 정치적으로 남인으로 처신하지만 서경덕 조식 문인들과 관계를 끊지 않았기 때문에 사상적으로는 영남 남인과 다른 요소들이 많았으며 뒤에 근기남인 실학파에 영향을 주었고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25년 문목(文穆)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성주회연서원 천곡서원 칠곡의 사양서원 창녕의 관산서원 충주의 운곡서원 현풍의 도동서원등에 제향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다만 더 부끄럽고 한탄스럽다 라는 의미인 오늘의 성어 지증괴탄(秖增愧歎)을 선정한 것은 글에 오묘한 뜻이 내포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부끄럽고 한탄스러울 때 우리 선현들이 평소에 쓰는 평범한 일상용어를 찾다가 찾은 말이라 휘호로 남기고 백운필담에 담아 공유하고자 한다

 

桓紀 9218(신축)214일 오후에 白雲仙士 金大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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