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석과불식 碩果不食

백운선사 김대현 2021. 4. 8. 10:51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석과불식 碩果不食

클 석실과 과아닐 불밥 식

 

큰 과일은 먹지 않고 남긴다 즉 자신이 가지려는 욕심을 참고 남김으로서 뒷사람들에게 복을 물러 준다는 의미이다

 

이 성어는 조선 중기의 문신 상촌 신흠(象村 申欽1566~1628)선생의 시문집인 상촌고(象村稿) 권삼십사(卷三十四)에 윤차야()에게 답(答尹次野)편지에서 발췌하다

 

數日前偶有一友來說 수일전우유일우래설

壞弄之輩 指點鄙生與㬌擇兄弟曰 괴롱지배 지점비생여경택형제왈

某也峻 某也不平淡 모야준 모야불평담

刻論從此而出云 각론종차이출운

假使賢兄輩 以鄙生爲可以屬此事 가사현형배 이비생위가이속차사

以此怪論 賢兄輩將何以遏止之耶 이차괴론 현형배장하이알지지야야

古今天下 未有其身不免於指點 고금천하 미유기신불면어지점

而能當一世之責也 이능당일세지책야

到此地頭 鄙人雖欲自薦如毛遂 도차지두 비인수욕자천여모수

人且不許矣 인차불허의

此等論議 想兄未及聞之 차등론의 상형미급문지

潤卿之心 鄙生知之 윤경지심 비생지지

深喜兄之知之有合於鄙生也 심희형지지지유합어비생야

但碩果不食 단석과불식

乃天地貞元之會 내천지정원지회

豈可以一鄙生前却之故 기가이일비생전각지고

而相率以退也 이상솔이퇴야

唯願諸兄 爲時懋勉而已 유원제형 위시무면이이

鄙生形迹之說 亦不敢再發於口 비생형적지설 역불감재발어구

致有外人之疑惑也 치유외인지의혹야

無由面罄 適有客來 무유면경 적유객래

信筆忙草 謹此覆 신필망초 근차복

 

며칠 전에 한 친구가 우연히 찾아와서 말하기를

헐뜯고 희롱하는 모리배들이 경택 형제와 더불어 저에게 가리키면서

누구는 험악하고 누구는 평범하지 않으니

각박한 의논이 이 곳부터 나올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가령 어진 형이 저한테 이 일을 부탁한다하여도

이와 같은 괴상한 논의를 어진 형이 장차 어떻게 그것을 막겠습니까

고금 천하에 그의 몸이 가리키는 것을 면하지 못하면서

한 시대의 책임을 능히 감당할 수 있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지경에 다다랐으니 제가 비록 자신의 추천을 조나라 모수처럼 하고 싶어도

사람들이 또한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등등의 논의는 형이 미처 그것을 듣지 못하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윤경의 마음은 제가 그것을 알고 있으므로

형이 알고 계시는 그것이 저와 맞는데 있어서 매우 기뻐합니다

다만 큰 과일은 먹지 않고 남기는 것은

이에 천지의 겨울과 봄 사계절이 이어질 수 있는 기회입니다

어찌 저 하나가 그 연유로 물러난다고 하여

서로가 따라서 물러나서야합니까

오직 형들이 이때를 위하여 힘써 주시기만을 원할 뿐입니다

저의 행동거지에 대한 이야기는 또 감히 다시는 입 밖에 낼 수도 없으니

바깥사람들의 의혹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만나 뵙고 다 말씀드릴 길이 없었는데 때마침 손님까지 오셔서

붓 가는 대로 바빠서 급히 썼습니다 삼가 이만 답합니다

 

이 성어는 조선 중기의 문신 상촌 신흠(象村 申欽1566~1628)선생이 쓴 윤차야()에게 답(答尹次野)한 편지의 일부이다

윤차야 백사 윤훤(白沙 尹暄 1573~1627)선생은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차야(次野) 증찬성 윤희림(尹希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자감정 윤변(尹忭)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이며 어머니는 황대용(黃大用)의 딸이고 형인 영의정 윤방(尹昉)을 비롯한 네 형제가 모두 높은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성혼(成渾)의 문인이며 선조 23(1590)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97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합격하여 사관이 되고 1599년 호조좌랑을 거쳐 1605년 동래부사를 역임하였으며 광해군 3(1611)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대북세력을 제거하려 하였다는 죄명으로 압송되는 김직재(金直哉)를 후대하였다 하여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나 그 뒤 복관되어 1617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인조 2(1624)에는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625년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한 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부체찰사(副體察使)를 겸직하여 적과 싸웠으나 안주를 빼앗긴 뒤 평양에서 싸우고자 하였지만 병력과 장비의 부족으로 종사관(從事官) 홍명구(洪命耉)의 건의를 받아들여 다시 성천으로 후퇴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황해병사 정호서(丁好恕)도 싸우지 않고 황주를 포기하는 등 전세를 불리하게 하였다는 죄로 체포되어 의금부에 투옥되었으며 형 윤방을 비롯하여 조카 윤신지(尹新之)의 아내이며 인조의 고모인 정혜옹주(貞惠翁主)가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강화도에서 효수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석과불식(碩果不食)은 큰 과일은 먹지 않고 남긴다 즉 자신이 가지려는 욕심을 참고 남김으로서 뒷사람들에게 복을 물러 준다는 주역(周易) 박괘(剝卦)에 나오는 말이지만 각박한 오늘 날 나와 이웃과 민족을 위해 다시 한 번 반드시 생각해 봐야 할 성어 석과불식의 여유로움을 붓 들고 휘호하며 백운필담에 담아 놓고 세상이 더 밝아지길 기대해 본다

 

桓紀 9218(신축)227일 오전에 白雲仙士 金大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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