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혁엽화현 奕葉華顯

백운선사 김대현 2021. 4. 13. 16:33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혁엽화현 奕葉華顯

클 혁잎 엽꽃 화나타날 현

 

차례대로 가지마다 드러나게 꽃이 피다 즉 대대손손 높고 좋은 자리에 올라 이름을 드날리며 출세하다 라는 의미이다

 

이 성어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문단에 주목할 만한 업적을 세운 학자인 월정 윤근수(月汀 尹根壽 1537~1616)선생의 시문집인 월정선생집(月汀先生集) 권칠(卷七)에 우참찬 이공에 대한 제문(祭右參贊李公文)에서 발췌하다

 

海平府院君尹某 謹以酒果之奠 해평부원군윤모 근이주과지전

告于近故議政府右參贊鵝川君李公之靈 고우근고의정부우참찬아천군리공지령

嗚呼 稼牧接起以文章 오호 가목접기이문장

連中制科於中朝 大振厥聲 련중제과어중조 대진궐성

而天下固已知韓山之李 이천하고이지한산지리

後來企美 代有其人 후래기미 대유기인

奕葉華顯 左右熙運 혁엽화현 좌우희운

至公之身而一門卿相 지공지신이일문경상

乃有四人 可謂盛矣 내유사인 가위성의

然公溫良謙退 연공온량겸퇴

曾不以行能先人 증불이행능선인

篇章秀發 追古作者而曾不以文藝自居 편장수발 추고작자이증불이문예자거

盎然其春 栗然其玉 앙연기춘 률연기옥

士夫之所屬望 都人之所加額者 常在於公 사부지소속망 도인지소가액자 상재어공

而顧以士論携貳 與時相左 이고이사론휴이 여시상좌

魯不得柄用於世 로부득병용어세

論其官 止於大宗伯而已 殆所謂位不滿德者耶 론기관 지어대종백이이 태소위위불만덕자야

家有令子 玉樹羅庭 가유령자 옥수라정

緯武經文 咸作聞人 위무경문 함작문인

喉舌摠戎 其進未已 후설총융 기진미이

謂公不食其報而遺之後人者耶 위공불식기보이유지후인자야

 

해평부원군 윤 모는 삼가 술과 과실을 차례대로 올리며

근래 고인이 된 의정부 우참찬 아천군 이공의 영전에 아룁니다

오호라 가정 이곡선생과 목은 이색선생이 연이어 문장으로서 일어나

연달아 중왕조에 천자가 주관한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그 명성을 크게 떨쳐서

천하가 진실로 이미 한산 이씨를 잘 압니다

후대로 내려오면서도 그 아름다움을 꾀해서 대를 이어 그런 사람이 있었으니

자자손손 높은 관직에 올라 조정을 좌우에서 도왔습니다

공의 대에 이르러서 한 가문에 육조의 판서와 삼정승이

마침내 네 명이나 있게 되었으니 가히 성대하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공은 온량하고 겸손히 사양하고 물러났으며

일찍이 자신의 능력으로 먼저 남에게 이기려고 행하지 않았습니다

문장이 빼어나게 아름답고 옛 작자들을 쫒았지만 일찍이 문예로 스스로 행세하지 않았으며

봄날처럼 온화하게 넘쳐나고 옥처럼 견고하게 빛나셔서

사대부들의 촉망하는 바와 도성 사람들의 재상을 우러러 보는 바가 언제나 공에게 있었으나

돌아보니 사림의 논의가 서로 어긋나서 시류와 더불어 서로 합당하지 않아

어리석게도 세상에서 권한을 쓰는 자리를 얻지 못했는데

그 관직으로 예조 판서 대종백에 그쳤으니 거의 이른바 지위가 덕에 차지 못함이 아닐까요

집안에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정원을 둘러친 듯 아들들이 여럿이 있는데

무를 씨로 하고 문을 날로 하듯이 문무를 겸비하여 모두 다 명성이 자자하게 들리니

이방 승지가 되거나 총융사가 된 이도 있어 그 승진이 아직 끝이 아니라

이르기를 공께서 다 보답 받지 못하여 그것을 후손들에게 남겨주신 것이 아닐까요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인 월정 윤근수(月汀 尹根壽 1537~1616)선생이 지은 우참찬 이공에 대한 제문(祭右參贊李公文)의 일부이다

우참찬 이증(李增 1525~1600)선생은 본관은 한산 자는 가겸(可謙) 호는 북애(北崖)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종묘서영 지숙(之叔)이며 어머니는 김필신(金弼臣)의 딸이고 명종 4(1549)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156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정자에 보임되었다가 홍문관의 정자 박사 수찬 교리를 역임하고 이어 지평 사간원의 정언 헌납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육조의 관직을 거쳐 함경도북평사 경기도사를 지내고 선조 1(1568) 원접종사가 되어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고 1573년 이조정랑 검상 사인 집의 전한 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이르러 자급을 뛰어넘어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고 이때 내직으로는 병조 호조 형조의 참의와 판결사 및 도승지를 지냈고 외직으로는 황해 충청 전라경상 4도의 관찰사를 지냈으며 1585년 가선대부가 되었으며 뒤에 가의대부가 되고 이 때 형조 예조 이조의 참판 한성부의 좌윤 우윤 부제학 대사헌 동지의금부사를 역임하였으며 1589년 대관의 장으로 정여립옥사 국문에 참여하는 공을 세워 이듬해 평난공신 3등에 책록되고 아천군에 봉해졌으며 이 해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1591년 형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뒤에 정헌대부가 되어 형조 예조 공조의 판서 좌 우참찬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후에는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헌신하였고 죽은 뒤에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아천부원군에 추증되었으며 사람됨이 정직해 아첨을 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홍문관정자 재임 시에는 권간에 의해 북막에 좌천되기도 하였으며 청렴해 가산을 돌보지 않아 재상의 반열에 있을 때에도 가난한 선비처럼 생활했고 효도와 우애도 지극했으며 시호는 의간(懿簡)이고 저서로는 북애집 1권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차례대로 가지마다 드러나게 꽃이 피다 즉 대대손손 높고 좋은 자리에 올라 이름을 드날리며 출세하다 라는 의미인 오늘의 성어 혁엽화현(奕葉華顯)의 복이 백운필담을 구독하는 독자들 가정에 내재하길 진심으로 바라며 휘호하고 성어문집 백운 필담에 담아 공유하고자 한다

 

桓紀 9218(신축)32일 오후에 白雲仙士 金大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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